Wednesday, April 11, 2012

“샬롬”에 관하여

“샬롬”에 관하여


히브리어 '샬롬'은 “평안, 평강, 평화, 화평, 화목” 등의 뜻으로서 히브리 사람들의 인사로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났을 때 또는 편지 서두에 사용하면, “그동안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별고 없이 지내셨습니까?”라는 뜻이고, 헤어질 때 또는 편지 말미에 사용하면, “평안히 지내세요” “(건강을 포함하여) 평안하세요”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편지 끝보다는 처음에 인사말로 많이 사용합니다.
하나님과 관련하여서는 “하나님의 평안(=평강)이 당신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정도의 의미라고 생각하면 문안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전쟁의 용어로도 사용되었는데, 외진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평안이뇨?(=샬롬?)”이라고 묻기도 하였는데, 곧 ‘나를 헤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인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적진에서 병사가 다가올 때, “평안이뇨?” 물음으로써, 전쟁의 목적으로 오는 것인지 화친의 목적으로써 오는 것인지 확인하기도 하였습니다(왕하 9:18, 19, 22 참고).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바울의 서신들에서 처음 인사말로 사용되었습니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2; 살후 1:2; 딤전 1:2; 딤후 1:2; 딛 1:4; 몬 1:3).
바울의 서신의 말미에서는 가끔 축복을 기원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고후 13:11; 갈 6:15; 엡 6:23; 살전 5:23; 살후 3:16; 몬 1:20).

베드로도 베드로전서(1:2)와 베드로후서(1:2)에서 각각 인사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샬롬이 히브리인들의 인사말인 반면에, 헬라인들은 주로 “은혜”(카리스, χάρις)란 말로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바울의 서신들과 베드로의 서신들의 인사말에는 “은혜”와 “평강(=평안)”이 꼭 같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히브리인들과 헬라인들을 다 포함한 인사라기 보다는,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평안”으로 인사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6절에서 바울은 “평강의 주”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리스도인의 평강(=평안)의 근원(根源)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평안(=샬롬)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곧 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입니다.
 
 

정경(Canon) 형성에 관하여

정경(Canon) 형성에 관하여


구약시대에 기록되어진 성서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 중에 특별히 신뢰할만한 성서들을 선별하여 정경 속에 포함시킨 작업은 주후 90년경 얌니아(Jamnia) 회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도 많은 성서들--복음서, 서신들, 교훈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어떤 성서들은 저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으며, 어떤 서신들은 익명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저자의 이름이 알려진 것 가운데서도 실제 저자는 다른 경우도 있었습니다.
신약의 정경화 작업(canonization)은 2세기 중엽의 이단인 마르시온(Marcion)에 의하여 처음 시도되었다는데 대체로 동의합니다. 마르시온은 누가복음을 그의 유일한 복음서(Gospel)로 삼았으며, 바울의 서신들 중에 목회서신(디모데전-후서, 디도서)을 제외한 나머지 열 서신(이중에 ‘에베소서’는 ‘라오디게아서’라는 이름으로)으로 사도서(Apostolikon)로 삼아 이 열한 권만을 정경(Canon)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God of Israel, Creator, Demiurge)과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Unknown foreign God, Father of Jesus)가 다르다고 믿었기 때문에 구약은 배척하였습니다.

마르시온의 정경에 자극을 받은 로마의 정통교회(Catholic Church)도 교부들을 중심으로 서둘러서 정경화 작업을 하였는데, 이때 이레니우스(Irenaeus)는 누가복음 이외에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도 정경에 포함되어야 함이 마땅하고, 바울의 목회서신--디모데전-후서, 디도서--과 요한의 서신들, 베드로의 서신들 등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이후에 계속하여 어떤 성서들을 정경에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는데, 20-30권의 성서들이 포함되었다가 제외되었다가 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복음서와 바울서신들, 요한일서, 베드로전서 등은 대체로 진품인을 인정받았지만, 요한2서, 요한3서, 베드로후서,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등은 교부들과 시대에 따라서 진위가 엇갈리며 포함-제외의 과정을 거듭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주후 367년에 현재와 같은 순서의 신약을 처음 그의 서신에서 언급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는 대체로 이를 받아들이는 추세이었습니다. 물론, 동방의 교회들과 서방의 일부 교회들에서는 나름대로 여전히 다른 권수의 정경을 갖고 있었지만 현재의 정경이 완성된 것은 아타나시우스 때라고 보면 됩니다.

정경(Canon)은 구약과 신약의 많은 성서들 중에 그 저작이 진품이며, 성경의 일관된 교리들에서 벗어나지 않는 성서들로서,  ‘Canon'이란 말의 의미는 ’기준, 표준'이 되는 것‘(criterion)이란 뜻입니다. 많은 성서들 중에 이 정경이 특별히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크리스천 삶과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이슬람”에 관하여

“이슬람”에 관하여


이슬람 교도들이 귀하게 여기는 '지하드'(Jihad)는 주로 '성전(=holy war)이라고 번역되는데, 이는 '애쓰다, 투쟁하다'(=struggle의 의미)에서 온 것으로 '항상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슬람 교도들은 그들의 유일하신 하나님인 '알라 신'(곧, 유대교와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하여 그분께 복종하고 최선의 노력을 하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과격한 이슬람교도들에게서 느껴지는 호전적인 모습은 그들의 잘못된 경전의 이해이거나 잘못 비춰진 그들의 모습입니다.
이슬람 신앙에서의 예배의 핵심은 기도(=Salat)입니다. 그들은 하루에 다섯 차례-아침 기도, 정오 기도, 오후 기도, 일몰 기도, 밤 기도 등이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시작은 무함마드 (마호메드 또는 모함메드, Muhammed, -ad, or Mahommet, -ed, or Mohammed, 570-632)에 의하여 주후 622년부터입니다.
"이슬람(Islam)"의 뜻은 '복종'입니다. 므슬림(Muslim)은 이슬람 교도들입니다. 므슬림 신조의 첫 번째 절은 "나는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음을 증언한다"고 되어 있고 이 신조의 보완적인 뒷 부분은 "나는 무함마드가 알라의 사자임을 증언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경전인 코란(Qur'an=Holy Book)은 1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의 시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Chapter 1.   Al-Fatihah (Opening) (revealed before Hegira)
 1. With the name of Allah, the Most Gracious, the Ever Merciful,
    (I commence to read the Holy Book)
 2. All type of perfect and true praise belongs to Allah alone,
    the Lord of the worlds,
 3. The Most Gracious, the Ever Merciful,
 4. Master of the Day of Requital.
 5. (Lord!) You alone do we worship and You alone do we implore for help.

 (1장. 서장, 무함마드가 Mecca에서 Medina로 도피한 Hegira (Hijrah) 이전에 계시되다)
  1. 가장 은혜로우시며, 항상 자비하신 알라 신의 이름으로
     (나는 경전을 읽기 시작합니다.)
  2. 모든 종류의 온전하고 진실한 찬양은 모든 세계의 주님이신 알라 신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3. 가장 은혜로우시며, 항상 자비하신,
  4. 보수(또는 보복)의 날의 주님,
  5. (주님!) 우리는 당신께만 예배드리며, 당신께만 도움을 간청합니다.)

코란의 3장 19절에서는 "알라 신에게 열납되어지는 참된 믿음은 이슬람뿐이다"(=Decidedly, the true Faith acceptable to Allah is Islam)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코란에서 예수님(=이사, `Isa)은 위대한 선지자 정도로 여겨집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무함마드를 비롯하여 (주로) 아랍인들로 유대교와의 갈라짐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갈과의 사이에서 나은 이스마엘로부터 갈라집니다.

구 예루살렘(Old Jerusalem)의 중심에 황금색 지붕을 한 '엘 악사 모스크'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린 바위라고 전해 내려오는 큰 바위를 담은 '오마르 모스크'(Dome of Rock)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랍인들은 지금도 이곳을 성지로 여기고 찾아와 맨발로 절을 하며 예배드립니다. 이 오마르 모스크 안에 있는 큰 바위 바로 밑에서 무함마드가 이상 중에 바위를 뚫고 승천함을 체험하였다고 이슬람 교도들은 주장합니다. 물론 무하마드의 승천은 육체적 승천은 아닙니다.
구 예루살렘을 둘러싼 벽 (1,500년대에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서 건설되었다는 성벽) 안에 헤롯 성전(그전에는 솔로몬 성전의 자리)의 잔재인 통곡의 벽(Wailing Wall 또는 Western Wall: 헤롯성전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다 무너져 내리고 성전을 둘러쌓던 벽들 중에 서쪽 벽만이 남아 있음)과 예수님께서 두 강도들과 죽으셨다는 장소와 묘실(Holy Sepulchre)이 있습니다. 해서, 이곳은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이 다같이 공히 성지로 여기는 장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들 간의 갈등은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에 관하여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에 관하여

 
예수님의 천국(=Kingdom of Heaven: 마태복음 용어,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비유의 가장 상세한 내용은 마태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4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누가복음 13:18-21에 두 개(겨자씨, 누룩)의 하나님 나라 비유가 나오고 누가복음 14:15-24에 혼인잔치의 비유와 19:11-27에 므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천국비유 또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천국/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가를 설명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하나님 나라의 (지상에서의) 임함과 확장, 그곳을 얻기 위한 사람들의 사모함이나 열정, 천국/하나님 나라에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가, 천국의 임함의 기다림 등에 관한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3:18-19에서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한 것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시작(또는 크리스천 믿음의 시작)이 겨자씨 한 알만큼 작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작은 겨자씨 한 알만한 하나님 나라(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믿음)의 시작이었지만 후에는 그것이 큰 나무(겨자나무는 그렇게 커진다고 함)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13:20-21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누룩에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성장에 관한 비유로 복음이 사람의 마음 속에 또는 삶 속에 은밀하게 스며들어 점점 확장되어짐을 의미함입니다.
그러나 누가 13:18-19와 20-21 모두 교회 안에서의 양적 성장이 영적 성장으로 뒷받침되지 않을 때, 오히려 위험을 가져올 수 있음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무성한 겨자나무에 깃드는 공중의 새들은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질적인 풍부가 아닐 수 있으며, 또한 누룩(예수님은 누룩을 다만 부풀어지는 또는 풍성하여지는 속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하심)이 전부 부푸는 것도 영적인 풍성함이 아닐 때에는 오히려 해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숫적 풍성함이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영적 축복과 은혜의 풍성함이 아닐 수 있듯이).

보다 더 상세한 천국/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나오는 마태복음에서의 천국비유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마태 13:3-8/18-24..."(천국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예수님의 유명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도 천국 비유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씨는 다름 아닌 "천국 말씀"(13:19)입니다. 천국 말씀을 듣고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 결실을 거둔 사람이 천국 백성이 되기에 합당한 자입니다.)

2. 마태 13:24-30..."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좋은 씨를 뿌리는 이: 인자, 밭: 세상, 좋은 씨: 천국의 아들들, 가라지: 악한 자의 아들들, 가라지를 심은 자: 마귀, 추수 때: 세상 끝, 추숫군들: 천사들)

3. 마태 13:31-32(비교: 누가 13:18-19/마가 4:30-32)..."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겨자씨: 천국의 시작[크리스천 믿음의 시작]이 작음을 의미, 나무가 됨: 천국의 외적 성장, 공중의 새들: 천국[또는 교회]을 찾아 깃드는 사람들)

4. 마태 13:33(비교: 누가 13:20-21)..."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은밀하게 스며들어 점점 확장되어갑니다. 누룩은 하나님 나라의 내적 성장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의 양적 성장이 영적 성장으로 뒷받침되지 않을 때, 오히려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5. 마태 13: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이 보화와 같은 천국의 비밀을 발견한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얻고자 합니다.)

6. 마태 13:45-46..."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4절과 유사한 비유)

7. 마태 13:47-50..."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어부의 그물에 각종 고기들이 걸리지만, 그물에 걸린 고기들은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마지막 때],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천국에 들어가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물은 각종 사람들이 모여든 교회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8. 마태 18:23-35..."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하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우리 각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셨는데, 우리 중 어떤 이는 그 빚졌다가 탕감받은 동관과도 같이 자기 주위 사람의 사소한 빚[=잘못]을 용서해줄 줄 모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그의 용서를 거두어 버리십니다.)

9. 마태 20:1-16..."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하시는 셈의 방법은 우리 인간의 셈과 같지 않습니다. 늦게 믿은 자[=일하러 포도원에 온 자]도 먼저 믿은 자와 똑같은 구원을 얻습니다. 오히려, 먼저 된 자가 하나님의 셈 방법에 불평할 때, 나중 된 자를 더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10. 마태 22:2-14(비교: 누가 14:15-24)..."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어떤 임금[=하나님]이 종들[=선지자들]을 보내어 자기 아들[=예수님]을 위한 혼인잔치[=천국잔치]에 사람들[=선택받은 이스라엘]을 청하였으나 그들이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종들을 다시 사거리에 내보내어 사람들[=이방인들]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합니다. 이중 어떤 사람은 예복을 입고 왔으나[=그리스도를 만날 준비를 갖춘 크리스천], 어떤 사람은 예복을 갖추지 않고 왔습니다. 이 때, 임금은 예복을 입고 오지 않은 사람들은 바깥 어두움으로 내어 쫓습니다.)

11. 마태 25:1-13..."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러 많은 크리스천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이 등은 준비하되 등을 계속 타게 할 기름[=영적신앙생활 지속의 요소]을 가져가지 않아 깨어있지 않고 졸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슬기 있는 다석 처녀와 같이 준비된 마음과 믿음으로서 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게 됩니다.)

12. 마태 25:14-30 (비교: 누가 19:11-27)..."(천국은)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어떤 사람[=예수님]이 타국[=천국]에 갈 때 그 종들[=믿는 사람들]에게 그 능력에 따라 달란트[=직분]를 맡겼는데, 그 주인이 돌아왔을 때[=재림] 어떤 사람은 자기의 달란트를 잘 경영하여 칭찬을 듣고, 어떤 사람은 게을리 하여 어두운 데로 내어 쫓김을 당합니다.)

 

반유대주의(Anti-Semitism)에 관하여

반유대주의(Anti-Semitism)에 관하여



누가 예수님을 죽였는가? (Who Killed Jesus?)
먼저, '예수님을 누가 죽였는가'란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위시하여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서신은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로 본디오 빌라도와 로마병정들보다는 유대인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2절에서 "(유대인)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셨을 때, 빌라도는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자 해서 유대인들에게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 한 명을 놓아줄 것'을 선택하게 하였지만, 그들은 끝내 예수님 대신에 무법한 강도 바라바를 놓으라고 종용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세 번씩이나" "나는 (예수에게서)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 놓으리라"(눅 23:22)고 했지만, 유대인들은 끝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였"습니다(눅 23:22).
그들은 빌라도에게 끊임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못 박으소서"(마태 27:22, 23; 마가 15:13, 14; 누가 23:21, 23; 요한 19:6, 15)를 외쳤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를 주저하는 빌라도에게 "그 피를 우리(=유대인들)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하여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결단하게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 23절에서 베드로는 유대인 무리에게 "너희(=유대인들)가 법 없는 자들(=빌라도를 비롯한 로마인들)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7장 52절에서 스데반도 "이제 너희(=유대인들)는 그 의인(=예수님)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라고 하여 유대인들이 의인이신 예수님을 죽였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바울 역시 데살로니가전서 2장 15절에서 직설적으로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 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 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이쯤 하면, 성경이 '예수님을 누가 죽였다'고 하는지 알 수 있겠지요.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인 책임이 없는가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일차적 책임자라고 한다면, 십자가형을 언도한 빌라도는 이차적 책임자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당시 그 자리에 없었기는 하지만 (아담과 가인의 죄성을 지니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심정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참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죽인 책임은 대를 이어서 내려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울은 이를 로마서 5장 6절, 8절과 10절에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6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8절)와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10절)란 말 가운데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유대인들을 용서하셨는가?
누가복음 23장 34절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이미 유대인들의 (그를 못 박음에 내어준)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 6:44)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누가복음 6장 27-28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데반도 그를 돌로 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전 7:60)라고 간구했습니다.

'반유대주의(Anti-Semitism)'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지적하는 것은 '반유대주의(Anti-Semitism)'가 아닙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베드로도(행전 2:23), 스데반도(행전 7:52), 그리고 바울도(살전 2:15 등)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는 자기들의 동족을 안타까움과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향하여 호소한 사람들입니다.

'반유대주의자(Anti-Semitists)'의 대표적 인물로서 히틀러(Adolf Hitler)를 꼽습니다. 로마카톨릭 신자였던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유대인들을 증오하는 마음으로 600만의 유대인을 대량학살한 살인마였습니다.
'반유대주의(Anti-Semitism)'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이유로 또는 '유대인이면 왠지 모르게 밥맛이 없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저주하고 증오하고 무조건 싫어함을 말합니다. 셈의 후손이 하나님의 가장 축복받은 족속인데, 이 셈족의 대표격 민족인 유대인들을 여러 가지 이유로 싫어함이 '반유대주의(Anti-Semitism)'입니다.

'반유대주의(Anti-Semitism)'는 어떤 명분으로라도 성경적인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도 유대인들이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유대인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한) 복된 소식(=복음)을 전한 사람들'-바울도 바나바도 마가도, 베드로와 요한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5장 27절에서 "저희(=아가야와 마게도냐로 대표되는 이방 크리스천들)는 그들(=유대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유대인들)의 신령한 것(=복음)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유대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에 관하여

삼위일체에 관하여


삼위일체(Three Persons in One Nature)에 관하여 잘 설명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삼위(Three Persons)--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의 속성(One Nature) 안에 모두 계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자칫 잘못 성명하면, 이단으로 몰리기 쉬운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 양태론, Modalism).
한 분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면, 그 전체가 하나님이시며 성부(=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한 분 하나님의 말씀을 성자(=아들)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한 분 하나님의 생각, 지혜 혹은 영을 성령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신(=영)이 태초 때부터 "수면에 운행하셨으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성자 하나님과 더불어, "가라사대" 1:3, 6, 9, 11, 14, 20, 22, 24, 26, 29; "(말씀)하시고"...1:6, 15, 22, 26, 28, 30)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곧, 삼위의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부터 계시고 함께 천지와 공중과 바다와 땅위의 생물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삼위가 하나인 것은 하나님께서 역할과 그 교통하심에 따라서 때로는 성부(=아버지) 하나님, 성자(=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불리우지만 한 분 하나님의 형상(혹은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하나님의 지혜에 관하여는 잠언 8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지혜가 태초 전부터 여호와 하나님(여기서는 성부 하나님과 거의 동일 개념)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속에 계셔서 하나님의 사정과 생각을 알게 하시고, 나의 사정과 생각과 간구를 하나님께 전달하여 주십니다(=성령의 교통하심). 하나님의 속 사정을 알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서는 고린도전서 2장 10-1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셔야 할 것은 그리할 때만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헤아려 알 수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 곧 성자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증거되어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One Nature of God)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성자 하나님이신 말씀(=성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2,000년전 유대땅 베들레헴에 태어나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성자 하나님)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하나님을 우리 인간에게 더 자세하게 알려 주시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까?
예,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온전하신 하나님이시요, 온전하신 사람이십니다 (즉, 예수님은 반은 하나님이시고 반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런 고백이 어디에 있습니까?
요한복음 20장 28절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본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하였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장 8절에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삼위의 하나님이 일체되심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2장 4-6절에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성자 하나님)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성부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에베소서 4장 4-6절에서는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만유의 아버지시라. ..."고 함으로써 성령, 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한분 되심을 강조합니다.
또한 창세기 1장 26절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고 복수(=성부, 성자와 성령의 삼위)로 표현되어 있고, 1장 27절에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따라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라고 단수(=한분 하나님)로 표현되어 있는 구절들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금생(今生) 이후의 세계에 대한 성경적 고찰

금생(今生) 이후의 세계에 대한 성경적 고찰



유대인들은 영혼의 불멸은 대체로 믿어왔으나 육신의 영속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을 잘 믿던 자이거나 그렇지 못한 자이거나 다 음부(=스올:שׁאול)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스올라고 하는 음부는 우리가 사는 땅의 아래에 있는 것이라고 믿어졌습니다(창 37:35; 민 16:30; 신 32:22; 삼상 28:13; 욥 14:13, 17:23, 38:17).

고대 근동(The Ancient Near East, ANE)의 문학에서도 이 죽은 자들의 지하세계(=the Nether World)에 대해서 다루고있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Descent of Ishtar to the Nether World를 보면, 풍요의 여신 이쉬타르(Ishtar는 Akkadian 이름으로, Sumerian 이름은 Inanna임)가 돌아올 수 없는 땅(“the land of no return")인 죽은 자들이 거주하는 지하세계(“the Nether World")를 여행함이 묘사되어있습니다.

기원전 200년 전후에 유행하던 묵시문학(Apocalyptic), 외경(Apocrypha), 위경(Pseudepigrapha) 등을 거치면서, 지하에 있다고 믿어져왔던 음부(스올; 하데스: ᾅδης)는 제삼 하늘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참고: 에녹2서 10:1). 그 개념도 죽은 사람들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다가 죽은 사람들이 거하는 곳으로 한정되어졌습니다(참고: 누가 16:23). 하나님을 잘 믿다가 죽은 사람의 영혼은 낙원(파라다이스; παράδεισος)에 들어가는데 이곳에는 생명나무(“the Tree of Life")와 생명강과 각종 실과가 있는 곳이라고 믿어집니다(에덴동산: 에녹2서 8장; 누가 16:23; 계시록 2:7).

영혼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낙원(פרדס; παράδεισος)과 음부(שׁאול; ᾅδης)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 백보좌 심판(“the White Throne Judgment") 후에 영혼과 몸이 함께 거하는 천국(ἡ βασιλεία τών οὐρανών)과 지옥(γέεννα)으로 대체되어집니다(그러나 낙원이 천국의 의미로, 음부가 지옥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함).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에 관해서는 신약성경에서 주로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천국은 몸으로 부활한 성도들이 최후의 심판 이후 하나님과 함께 거하면서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고 영광돌리는 삶을 사는 영원한 처소입니다.
지옥이란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외에는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의 서신 3장 6절에서만 그 명칭을 찾을 수 있는데 그 근원은 역대하 28장 3절과 33장 6절에 나옵니다. 곧,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몰렉에게 자녀를 불에 태워 제사를 지내왔고, 후에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가 지저분한 쓰레기를 태우는 장소로 사용된 것에서 지옥(게헨나, γέεννα)은 이와같이 하나님을 잘 믿지 않던 쓰레기와도 같은 인간이 영원히 불타는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지옥이란 말이 나오지 않는데, 다만 그 개념이 이사야서 66장 24절에 나옵니다(“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며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참고사항
1. 위경서중에 하나인 에녹2서는 하늘을 열 개의 하늘로 보고, 제 10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고, 제 3 하늘에는 낙원과 ‘무서운 고통의 땅’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에녹2서 8:1-5, 10:1).

2. 낙원(παράδεισος): 1) (Persian origin) 광대한 보호구역, 사냥지, 물이 잘 흐르는 공원, 목초지; 2) (일반적) 정원, 휴식처(동산, 즐거운 장소(느 2:8; 전 2:5).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살던 에덴 동산.

3. 음부(שׁאול; ᾅδης): 1) 플루토 ... 지하세계의 신; 2) 오르쿠스 ... 지하세계, 사자(死者)의 세계, 3) 사후의 중간 상태, 4) 지옥(地獄).

4. 지옥(γέεννα): 1) 바깥 어두운 데(마태 8:12); 2) 풀무 불(마태 13:50); 3) 영원한 불(마태 18:8); 4) 지옥 불(마태 18:9).

 

십일조에 관하여

십일조에 관하여


1. 십일조의 시작: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십일조는 아브라함이 살렘왕 멜기세댁에게 전리품 중에서 십분지 일을 바친 것입니다.
(창세기 14: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댁에게 주었더라.")
두 번째 등장하는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벧엘에서의 야곱의 서원기도입니다. (창세기 28:20-22..."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2. 십일조의 목적:
1.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심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所有)임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그중 십의 일을 취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로는 아홉을 갖고 살게 하십니다.
레위기 27:30..."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로마서 11: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2.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열두 지파(레위는 빠지고, 대신에 요셉이 두 지분을 차지함--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땅의 기업을 허락하시되, 하나님의 전(殿)을 돌보는 레위지파에게는 땅의 기업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온전히 이 일에 그들의 힘과 노력을 기울이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열두 지파로 십일조를 바치게 하심으로 레위지파의 경제적 삶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번제, 화목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는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기 위한 것이나, 십일조는 하나님이 레위지파의 생활을 위해서 쓰시고자 함입니다.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그들의 십일조를 레위지파를 위해서 떼고, 레위지파는 다시 이 십일조의 십일조를 아론의 후손들을 위해서 바칩니다. 아론의 후손들은 십일조의 최종적인 사용자가 되고 그들은 그들이 받은 십일조를 따로 뗄 필요가 없습니다.
또 매 삼년마다 별도로 소산의 십일조를 (가난한) 레위지파 사람들과 객과 과부와 고아를 위해서 바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진 다음에는 레위지파를 위한 십일조 이외에 왕을 위한 십일조(=10% 세금: tax)도 바쳐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한 사람의 소득 혹은 소산에 대한 매년 부담은 왕정정치 이전에는 13.3%이었고 왕정정치 이후에는 23.3%가 되었습니다(레위자파를 위한 10%, 왕 또는 국가를 위한 10%, 매 삼년마다 객과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레위 자손들을 위한 10%[=매년 3.3%]).
민수기 18:21..."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다 갚나니." (cf. 민수기 18:24)
민수기 18:28..."너희(=레위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擧祭)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십일조로서의)은 제사장 아론에게 돌리되"
신명기 14:28-29..."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cf. 신명기 26:12-14)
사무엘상 8:15-17..."그(=왕)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세금으로서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너희 양 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3. 신약성경 속의 예수님의 십일조에 대한 입장: 온전하고 허식(虛飾)이 없는 십일조를 권하십니다.
마태 23:2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의와 인과 신)도 행하고 저것(=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비교: 누가복음 11:42)

*성경구절 인용(引用) 

구약 성경
창세기 14: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댁에게 주었더라." (최초의 십일조: 아브라함이 살렘왕 멜기세댁에게 십일조를 받침)
창세기 28:20-22..."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벧엘에서의 야곱의 서원 기도)
레위기 27:30..."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cf. 레위기 27:31)
레위기 27:32..."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민수기 18:21..."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다 갚나니." (cf. 민수기 18:24)
민수기 18:26..."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민수기 18:28..."너희(=레위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擧祭)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십일조로서의)은 제사장 아론에게 돌리되"
신명기 12:6..."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하나님의 택하신 예배 장소) 가져다가 드리고" (cf. 신명기 12:11)
신명기 14:22..."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cf. 신명기 12:17-19, 14:23-25)
신명기 14:23..."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The Living Bible: "... The purpose of tithing is to teach you always to put God first in your lives."
["십일조의 목적은 너희에게 하나님을 항상 너희의 삶의 첫 번째에 두도록 가르치기 위함이라."])
신명기 14:28-29..."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cf. 신명기 26:12-14)
사무엘상 8:15-17..."그(=왕)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세금으로서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너희 양 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역대하 31:5-6..."왕(=히시기야)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처음 것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유다 여러 성읍에 거한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왔고, 또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왔으며" (cf. 역대하 31:12)
느헤미야 10:37-38..."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에 두고 또 우리 물산의 십일조를 레위사람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물산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 (cf. 느헤미야 12:44, 13:5, 13:12)
아모스 4:4..."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말라기 3:8-10..."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신약성경
마태 23:2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의와 인과 신)도 행하고 저것(=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누가 11: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公義)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행하고 저것(=십일조)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누가 18:12..."나(=바리새인)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금식과 십일조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바리새인의 위선이 잘못임)
히브리서 7:2-10..."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멜기세댁)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고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댁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蔽一言)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댁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로마서 11: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고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고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란 소설을 읽어보았다. 그 소설에는 신학도의 길을 가다가 중도하차한 민요섭이란 삼십대 초반의 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 사람의 피살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노트를 통해, 야훼 하나님보다 더 완전한 신을 찾고자 하는 그의 방황과 갈등이 알려진다. 1979년에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품인데 이 소설을 통하여 이문열은 인간의 논리와 관념 속에서 완전한 신을 찾고자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완벽한 신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약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를 접하면서 갖는 의문은 한결같이 공통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는 전지전능하시다고 하는데 그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것을 모를 수 있었는가? 또한 그가 옛뱀의 미혹에 빠져 타락한 모든 책임을 인간의 자유의지에 돌리는데, 악에게 미혹되어 넘어지는 자유의지라면 그 인간의 의지 가운데는 이미 악의 요소가 들어있거나 하나님의 속성이 불완전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다. 곧,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 책임이 아니라 그렇게 유혹에 쉽게 노출되게 만드신 ‘야훼’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질문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관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땅에서 배고품의 문제와 질병의 문제, 기타 정치, 사회적 문제가 해결됨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요, 이러한 것이 해결되지 않는 내세의 ‘하나님 나라’는 무의미하다고 본다.

좀더 완전한 신을 발견하고 지상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중도하차한 신학도 민요섭에게는 성경 속에서 만나는 불완전한(?) 야훼 하나님과 예수님이 말씀하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보다 더 중요하게 보인다.
좀더 완전한 신의 발견을 위해서는 2세기 영지주의의 여러 갈래 중 하나인 오파이츠(Ophites, Serpent Worshipers: 뱀, 지혜의 계시자)를 따르고 지상의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는 일본의 실천신학자 가가와 도요히꼬의 주장을 따른다.

이문열은 민요섭을 통하여, 민요섭은 그의 노트에 기록된 그의 작품 속의 아하스 페르츠를 통하여 그들의 신에 대한 추구를 다루고 있다. 예수님과 비슷한 시대를 산 가상의 인물 아하스 페르츠는 야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회의를 제기하며 좀더 완전한 신의 발견--창조--을 위하여 먼 방황의 길을 떠난다.
아하스 페르츠는 이집트, 가나안 지방과 페니키아 해변, 히타이트 카르게미쉬 지방, 바벨론, 페르시아를 거쳐서 인도까지 갔다가 로마에 이르지만 그가 찾고자 했던 야훼보다 더 완벽한 신은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는 야훼 속에서 이제껏 너무 일면만을 봄으로써 발견하지 못했던 온전한 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십년의 방황의 세월 끝에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야훼 속에서 새로운 신의 발견과 부름을 위해서 ‘쿠아란타리아’란 광야로 나가 40일의 금식을 단행한다.
금식이 끝난 다음날, 그는 근처의 바위산 기슭에서 그처럼 40일 금식을 하고 있는 예수란 청년을 만나는데,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아하스 페르츠는 이 예수란 청년이 과연 그와 온 이스라엘이 기대해온 메시아인가 시험하기 위해서 복음서에 마귀가 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메시아라는 생각은 현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의 메시아관이기도 하다. 곧, 이 세상에서의 풍요로운 빵과 기적과 지상의 권세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청년 예수는 이의 실현을 거부한다. 그 이후에도 아하스 페르츠는 군중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능력을 보았기에 기적과 권세로서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라고 권고하고 강청하지만 예수는 번번히 거절한다. 결국 아하스 페르츠는 야훼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현되기를 원했던 메시아의 모습을 보지 못하자 철저히 그를 증오하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는 것을 고소해 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 민요섭과 그를 철저히 따르는 조동팔은 아하스 페르츠의 방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아하스 페르츠가 중단한 완전한 신의 발견을 민요섭은 초기작품 뒤 7-8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다시 추구한다. 그들이 한 일이란 성경속의 ‘야훼’ 하나님을 온전한 신의 반쪽으로, 그리고 온전의 또 다른 반쪽 신을 등장시키는 그들의 성경 ‘쿠아란타리아’서를 만드는 것이다. 작가 이문열이 제시한 새로운 이원론적인 양성의 신은 기막힌 독창적인 발견인 것 같지만 기실은 영지주의자들이 2세기 중엽에 이미 제시한 이원론의 신을 소설화한 것일 뿐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로는, 인간의 창조는 불완전한 신인 야훼에 의해서 이뤄지고 야훼는 인간의 맹목적인 복종을 원하여 지혜의 눈을 밝히는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했지만, 지혜의 신 소피아(Sophia)는 그의 대리자 옛 뱀을 보내어 인간이 어리석은 창조자 야훼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참 자유와 지혜를 얻게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참 크리스천의 자유는 불완전한 신 야훼가 만들어놓은 율법의 사슬에서 벗어나 영지(Gnosis)라 표현되는 지혜의 깨달음으로 구속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민요섭이 발견했다고 주장한 완전한 신은 온전을 이루는 두 반쪽의 신, 곧 선의 신 야훼와 지혜의 신의 조화로 이루어진다. 그 신은 “선악의 관념이나 가치판단에 관여하지 않는 신이며, 먼저 있은 존재를 뒤에 온 말씀으로 속박하지 않는 신이며,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시인하는 신이며, 천국이나 지옥으로 땅위의 삶을 간섭하지 않는 신이며, 복종과 경배를 원하지 않고 희생과 강요를 강요하지 않는 신이며, 우리의 지혜와 이성을 신뢰하며 우리를 온전히 자유케 하는 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온전한 신을 발견한 민요섭은 그 신으로 인하여 기쁨이 넘쳐나지 않는다. 인간의 관념과 이상 속에서 창조된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니요 다만 허구(虛構)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민요섭을 살해한 그의 추종자 조동팔의 입을 빌어서 그는 말한다. “우리 인간은 신 안에 남아 있었어야 했다. 불합리 하더라도 구원(救援)과 용서(容恕)는 끝까지 하늘에 맡겨두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불합리하며 왜 모순이 많은 분으로 보일 때가 있을까?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자되시는 분으로서 알고자 하고 믿고자 하지 않고 나의 논리의 작은 상자 속에 담을 수 있는 분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죄(罪)의 기원(起源)

죄(罪)의 기원(起源)



그리스 신화(神話)에 등장하는 불의 신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하늘의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전해 주었다는 이유로 신들의 신 제우스(Zeus)의 노여움을 사서 카프카스(Caucasus) 산의 바위에 묶였다가 결국에는 독수리에게 간과 내장을 파먹혔다고 한다. 그보다 앞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와 인간들을 벌하기 위하여 판도라(Pandora: 그리스 신화, 인류 최초의 여자)에게 상자를 들려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냈는데 그 상자의 뚜껑을 열었더니 온갖 해악이 나오고 상자 속에는 희망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보는 해악과 절망, 인류 불행의 기원이라 할 것이다. 이 죄악의 기원이나 그리스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신과 인간간의 사랑이 독창적인 것 같지만 기존에 있었던 성경 속의 ‘죄의 기원’을 빌어서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다.

유대인들은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경위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이 세 가지 중 둘은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첫째 설명은, 정경(正經)에는 나오지 않고 위경(Pseudepigrapha) 중 하나인 에녹2서에 나온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근원적 태초, 하늘 위의 하늘에도 하나님 이외에 아무 존재가 없을 때와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창조의 태초 사이에 하나님께서 하늘에 천사들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임무를 맡기셨다. 그들 중 대천사(archangel)라고 하는 직분이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직분으로서 이조시대 임금의 명령을 전하는 도승지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기 위해서 성경에 등장하는 미가엘, 가브리엘 등도 이에 속하는 천사들이다. 그 대천사 중 하나인 루시퍼(Lucifer)라고도 하는 사타나일(Satanail)이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다보니까 나중에는 자신의 권능이 마치 하나님만큼이나 되는 줄 착각하고 다른 천사들을 부추겨서 하나님께 대적하였다가 패하여 공중으로 내쫓김을 당하게 된다.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이 사타나일에게도 은혜를 베푸셔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공중의 권세를 그에게 주신다.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는 창세기 1장 하나님의 여섯 날 동안의 창조 중 둘째 날에만 “보시기에 좋았더라”란 말이 빠진 까닭을 이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이 궁창 하늘--곧 공중의 권세를 사타나일에게 주실 것이기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며 흡족해 하지 않으셨다고 해석한다. 천사의 타락이 인간 타락의 빌미가 되었다.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된 두 번째 설명이 이어진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사단의 다른 형태(agent)인 옛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하는 사건이다. 하와만 먹었을 뿐 아니라 아담도 함께 먹음으로써 둘이 선악을 구분하게 되었고, 그들의 벌거벗음을 보고 부끄러워하였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을 두려워하여 숲속에 숨는다. 선악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일 때는 죄 짓는 일이 적었는데, 인간이 선악(善惡)을 알면서부터는 선을 행하려 하지 않고 선으로부터 먼 악을 더 행하게 된다. 믿는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일을 하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고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더 행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바울은 이를 ‘죄의 법’이라고 했다. 로마서 7장 19-21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罪)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한다.

셋째 설명은 노아의 홍수로부터 백이십 년 전의 사건으로서 창세기 6장에 그 개략이 나오고 위경서 중 에녹1서(1-36장)에 그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6장 1-2절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라고 했다. 에녹1서의 설명에 따르면, 세미아즈(Semyaz)와 아자젤(Azazel)이라고 하는 대천사의 지휘 하에 하늘나라 200명의 파수 천사들이 하늘로부터 지상을 굽어 내려다보니 사람의 딸들인 여자들이 아름다우매, 그들과 결혼하고 그들에게 화장하는 법을, 또 세상의 남자들에게는 전쟁하는 법을 가르침으로써 악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설명한다. 창세기 6장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肉體)가 됨이라.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믿음의 사람 노아에게 백 년에 걸쳐서 방주를 만들게 하셨다. 백 년의 시간을 주신 것은 노아의 순종을 보시기 위함이기도 하였지만, 그간에 혹시 ‘인간들이 그들의 패역에서 돌이킬까’ 기대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함을 아시기에 창세기 6장 5-6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했다.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와 번진 것은 마치 잉크 한 방울이 맑은 물이 담긴 병에 떨어진 것과 같다. 검은 잉크 한 방울은 처음 떨어진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곧 물병 전체에 번져서 물병의 물을 다 검게 만들어 버린다. 물병을 흔들 때 그 번지는 속도는 더욱 빨라서 삽시간에 물이 검게 변한다.


한자어가 증거하는 창세기의 사건들

한자어가 증거하는 창세기의 사건들


노아의 홍수와 얼마 후에 있었던 바벨탑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5,000-4,500년 전(주전 3,000-2,500년)에 일어난 창세기의 큰 두 사건이다. 바벨탑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사방으로 흩으셨는데, 중국인의 조상들도 이때 흩어져 황하강 쪽으로 오게 되었다. 이들이 한자어를 만들게 된 것이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때라고 한다. 상형문자인 한자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주전 2,500년), 즉 바벨탑 사건 이후이다. 그들이 문자를 만들 때 생각한 것은 선조로부터 전해들은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자어에서 창세기 사건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C. H. Kang 이라는 중국인 목사님과 Ethel R. Nelson이라고 하는 방콕 선교사 출신의 미국인이 지은 「창세기의 발견 (The Discovery of Genesis) 」(1979)라는 책에 의하면 한자어의 형성이 창세기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예로, 중국인 선조가 생각한 ‘복(福)’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혹은 첫 번째 사람)을 밭(정원, 동산)에 둔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를 창세기 2장 8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라고 기록했다. 또 육체를 뜻하는 ‘육(肉)’은 한 사람의 속(내)에 또 한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처음 만드시고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그 속에서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자기의 아내를 내자(內子)--안사람 또는 속사람이라고 불렀고, 한자의 영향을 받은 우리도 아내를 안사람이라고 부른다. 여자가 집안에 있어서 안사람이 아니라 남자 안의 것으로 만들어져서 안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육(肉)’의 바깥이 남자를, ‘육(肉)’의 안에 있는 사람(人)이 여자를 뜻한다면 이 둘이 합쳐질 때 육체를 뜻하는 ‘육(肉)’ 자가 된다. 창세기 2장 24절은 이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했다. 영어성경은 “they shall be one flesh."라고 표현했다.

홍수의 경우 ‘홍(洪)’과 큰 배를 뜻하는 ‘선(船)’은 노아 가족의 수 ‘8’과 관계가 있다. ‘홍(洪)’은 물이 지상에 범람했을 때 8명(노아와 그 아들 함, 셈, 야벳과 그들의 아내)이 손을 잡고 협력하여 구원받았음을 기억하고 만든 글자이며, 큰 배 ‘선(船)’은 보통 배를 뜻하는 주(舟)에 8명의 사람이 탄 것이므로 노아의 방주를 생각하며 만들었을 것이다.

‘탑(塔)’은 바벨탑 사건에 관한 기록을 연상시킨다. 바벨탑을 쌓되 흙과 풀을 재료로 쌓았고 이 사건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었다. 이때, 창세기 11장 1절의 기록대로, “구음(口音)이 하나이요 언어(言語)가 하나”이었다.

‘의(義)’자를 보면 ‘양(羊)’ 밑에 나를 뜻하는 ‘아(我)’가 있다. 곧,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밑에 나를 놓을 때 의로워질 수 있다는 해설이 가능한데, 4,500년 전 사람이 이것을 생각했을 리는 없고, 이를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我)자가 손(手)과 창(戈)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손에 든 창으로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드림으로 의로워진다는 의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노아 홍수 이전(antediluvian)의 기록으로는 아벨의 제사가 있다. 창세기 4장 4절에 보면 아벨은 양(羊)의 첫 새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다. 농산물을 제물로 드린 가인이나 양의 새끼를 드린 아벨이나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까닭은 부모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불의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 죄와 허물을 씻음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신 이유에 대해 우리가 흔히 아는 바로는 아벨은 첫 수확물인 양을 정성껏 드렸기 때문이고, 가인은 첫 수확물을 드리긴 드렸지만 구분함이 없이 아무렇게나 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를 달리 해석한다. 하나님께서 후에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것같이 이들에게도 죄와 허물을 용서받기 위해서 양(혹은 다른 짐승)으로 제물을 삼아 드리라고 명하셨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가인은 그 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물리치신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제사의 모형을 따라서 어린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제사를 드림으로써 인간을 의롭게 하셨다. 아벨의 제사,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을 좇는 이스라엘의 양을 제물로 삼는 제사는 어린양 제사의 모형이요 예표가 된 것같이, 한자 ‘의(義)’는 원래 손에 창을 들고 양을 죽여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의로워짐을 뜻하지만, 이 글자는 우리 각 사람이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앞에 꿇어 엎드릴 때 의로워지게 됨에 대한 예표요 모형이라고 믿는다.

Monday, February 27, 2012

"장기목회와 제반 회의 운영"

"장기목회와 제반 회의 운영"


목회자를 힘들게 하는 것은, 자기의 신앙적인 상태가 고조되어 있을 때나 바닥으로 처져 있을 때나,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설교해야 한다는 점이요, 수많은 회의를 인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목회 중에 회의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크다. 어느 때는 설교만 마치고 돌아가서 푹 쉬고 싶은데, 제직회나 당회, 또는 무슨 위원회 모 임 등 숱한 회의를 인도하다 보면 주일날 저녁때쯤은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지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어느 주일날은 은혜로운 설교를 통해서 온 교회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으나 제직회 도중에 발생한 의견다툼으로 인해서 교회 분위기가 살벌 해지기도 한다. 사실, 어느 목회자는 설교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너무 서툰 회의로 인해서 자주 실수를 범함으로 결국 교회 를 떠남으로 자신이나 교회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경우를 본다.
반대로 어느 목회자는 설교는 시원치 못하나, 회의와 교회 운영에는 능숙함으로 장기 목회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회의 진행을 잘하는 것도 장기 목회에서는 아주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면 회의를 어떻게 진행하여야 하는가?


1. 결정을 서둘지 않는 것이다.
목회 초년 시절에는, 목회 대선배들이 무슨 회의 중에 반대를 만나면 “이 문제는 다음 당회 때 재론하기로 하지요.” 혹은 “한 달 동안 기도해 보고 의논합시다”라면서 한발 물러서는 태도에 대해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는 그러한 모습은 지도자로서는 너무나 우유부단한 것이다‘고 비판하고는 했다. 그러나 목회 연륜이 깊어갈수록 필자도 그런 모습을 닮는 것을 발견한다. 왜 그런 모습을 닮게 되는가? 목회 현장에서 보면 서둘러 결정한 사안이 적지 않은 냉담이나 반대를 만나서 오랜 시간이 걸려 실행되는 경우를 보게 되는 반면, 한 달 늦추면서 얻어낸 합의가 온 교회의 협력을 통해서 의외로 빠른 시간에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2. 다른 분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다.
40대 초반 때였다. 한번은 제직회를 인도하는 중에 어느 분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의견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언지하에 “그것은 신학적으로 틀린 것입니다”라고 공박하고 묵살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제안했던 그 분이 그 뒤부터는 필자의 사역에 아주 비협조적으로 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후에 안 것이지만, 모처럼 의견 을 냈던 그 분은 필자의 공박을 ‘당신은 제발 무식한 소리를 하지 말라’는 뜻으로 오해함으로 너무나 속이 상해서 좀체 마음 을 풀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때에 필자는 크게 깨닫고 ‘이제부터는 누구의 의견이든지 존중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래 서 당회나 제직회 석상에서 형편없는 제안을 내 놓는 분이 있을지라도, 좋은 방안을 보충하여 그 의견이 성안이 되도록 힘썼고, 때로 나쁜 의도가 깔린 의견을 내놓더라도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 의견을 좋게 설명하면서 제안하고는 했다. 그러면 어느 때는 그 의견이 다른 분들에 의해 부결되는 경우가 있지만, 자기의 의견을 끝까지 존중해 준 필자에 대해서는 협조적으로 나가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3. 충분한 자료준비와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제반 회의 중 목회자가 안건을 내놓는 경우가 많 다. 그 때에 중요한 것은 제안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준비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점도 회원들을 존중하는 자세가 되는 것이다. 그 안건에 대한 많은 자료준비와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안에 대한 목회자의 깊은 관심을 당회원이나 제직들, 혹은 위원들이 느끼게 됨으로 쉽게 반대하거나 묵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성의한 자료 준비와 충분치 못한 설명은 결국 무성의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 분명하다.
 

"성경적 부부의 회복"

"성경적 부부의 회복"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신적인 기관이 있다면 그것은 가정과 교회이다.
교회는 신약시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을 이 땅에 보내 주심으로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었지만 가정은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최초로 허락하신 것이다.

교회는 가정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로 가정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근본적 모체가 되는 축복의 장이다.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우리의 가정들이 갖가지 이유들 때문에 깨어져 가고 있는 슬픈 현실이 때로는 가계에 흐르는 죄의 유전 때문일 수도 있고(출20:5), 자라난 환경 속에서 받은 상처 때문일 수도 있고,  실망되고 불만스러운 결혼 생활 때문일 수도 있고,  요즘처럼  물질적인 어려움을 맞아 경제적인 요인 때문에 불화를 겪는 경우도 있고, 자녀들의 문제나 시가나 처가 등 주위 친척들과의 갈등 때문일 수도 있고, 갖가지 주위의 시험과 유혹 때문에 가정이 불행에 빠지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래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어느 작가는 결혼 생활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20대에는 행복의 꿈에 부풀어서 신이 나서 살고
30대에는 서로에 대해 실망을 느끼며 환멸을 참으며 살고
40대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지못해 체념하며 살고
50대에는 서로 없어서는 안 되니까 의지하는 마음으로 살고
60대에는 서로 안 됐다 생각되어 가엾어서 살고
70대에는 지금까지 참고 살아준 것만 해도 고마워서 산다.

과연 우리의 부부 생활은 어떠한가?
지금까지 우리는 불행했던 부부의 행복을 회복하기 위해 정신(심리) 치료나 가족 치료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가정의 문제 해결을 위해 갖가지 노력을 다 기울여 왔다.
물론 이러한 치유의 과정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찬 가정의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성경적 부부 관계의 회복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적 부부 관계의 회복이 없이는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기 때문이다(마7:24-27).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부부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성경에서 부부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씀하시는 곳은 에베소서 5장, 골로새서 3장, 베드로전서 3장이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찾아보면 같은 말씀을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권면하신다.

I. 남편에게 순종하는 삶(엡5:22, 골3:18. 벧전3:1)
주님께서는 아내들에게 권면하실 때 다른 무엇보다도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명령하신다.
그것은 아내들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고 또한 아내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편 내조 잘 해라, 자녀를 잘 기르라, 시부모님 잘 모셔라, 집안 살림 잘 해라, 몸 단장 잘 하라는 말씀보다도 이 말씀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왜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이 안 되는가?

첫째, 많은 아내들이 남편이 이해되지 않거나 존경스럽지 못해서 순종이 안된다고 말한다.
둘째, 유교의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너무 굴욕적인 맹종을 강요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복종이란 단어 자체에 거부감부터 느낀다.
셋째, 심리학자 융(Carl Jung)에 의하면 여자의 무의식 속에 있는 애니무스(Animus)라는 남성성 때문이다.
넷째, 심리적으로 볼 때 여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자존심이 순종을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
다섯째, 궁극적으로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 남편에게 복종이 안 되는 것이다(엡5:21).

그러나 성경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고 권면한다.
여기서 ‘복종하라’(휘포타세스테)란 단어는 남편을 사랑함으로써 기쁨으로 섬기는 의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령 충만한 성숙한 아내는 주님께 복종하듯이 남편에게도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벧전3:5-6).

그러면 남편에게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
(1) 온유하고 안정된 마음(벧전3:3-4)
(2) 따스한 사랑의 말(약3:2-12)
(3) 몸으로 섬김(요13:15, 17)
(4) 만족스런 성생활(고전7:3-5)
(5) 말씀의 은혜 나눔(골3:16-17)
(6) 남편을 위한 기도와 돌봄(고전7:14)

아내의 남편을 향한 이러한 헌신적 사랑의 섬김은 어떠한 남편이라도 기필코 변화시키고 가정을 행복으로 이끄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II. 아내를 사랑하는 삶(엡5:25, 골3:19, 벧전3:7)
남편들의 경우는 여러 가지 사회생활을 통해 복종에 익숙해져 있으나 사랑이 안 되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이기 때문에 사랑을 베풀 것을 명령하신다.
남편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아내를 사랑하고 가족을 돌보는 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건강관리 잘하라, 밖의 활동 잘하라, 밖의 사람들에게 잘하라는 말씀보다도 가정에서 아내를 먼저 사랑하고 가정에 충실할 것을 권면한다(딤전3:5, 12).
그런데 왜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가?

첫째, 많은 남편들이 아내가 사랑스런 행동을 하지 않아서 사랑이 안 된다고 말한다.
둘째, 유교의 문화 속에서 너무 어머니의 사랑을 받다 보니까 사랑을 베풀기보다는 오히려 사랑받고 인정받길 원하는 의존성이 강하다.
셋째, 심리학자 융(Carl Jung)에 의하며 남자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원형(Archetype)이 ‘위대한 왕’이기 때문에 군림하려고만 한다.
넷째, 심리적으로 볼 때 남자의 마음속에 뿌리내린 이기심이 사랑을 가로막는 원인이 된다.
다섯째, 궁극적으로 남편들이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5)고 말씀한다.

여기서 ‘사랑하라’(아가파테)란 단어는 아내에 대해서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라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주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셨듯이(롬5:8)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내에게 어떻게 사랑을 베풀 것인가?
(1) 지금까지의 고생에 대한 감사(살전5:18)
(2) 세심한 관심과 마음의 배려(벧전3:7)
(3) 사랑이 담긴 카드나 선물(잠 18:16)
(4) 아내나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딤전5:8):  Meeting, Family Time
(5) 영적으로 아내를 격려하고 인도함(딤전3:5,): 부부 기도회, 가정 예배
(6) 아내를 위한 기도와 돌봄(고전7:14)

남편의 아내를 향한 뜨거운 사랑의 감동은 어떠한 아내라도 언젠가는 변화시키고 온 가정이 주님 앞에 굳게 서는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III. 부부 회복의 길
우리 부부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성경에 증거된 이 복종과 사랑의 말씀을 내가 먼저 실천하려고 하지 않고 상대방에게만 요구하는 데 있다.
그래서 흔히 예수 믿는 가정에 이런 부부 싸움이 일어난다.
남편이 큰소리를 치면서 “원 세상에 당신처럼 신경질적이고 재미없는 여자가 어디 있어? 나나 되니까 참고 사는 거지”하며 공격한다.
그러면 아내도 지지 않고 소리치길 “흥, 당신같이 자기주장만 옳다는 멋없는 남자도 세상에 드물걸요? 내가 어쩔 수 없으니까 죽어지내지” 한다.
그러자 남편이 성경을 인용하면서 소리치기를 “성경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는데 당신은 도대체 교회에 가서 뭘 배웠어?”
그 때 아내도 한다는 말이 “아니, 그러면 당신 성경책은 그 다음은 찢어졌어요? 그 다음에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잖아요?”소리친다.
이처럼 부부간에 복종과 사랑의 싸움은 일생토록 끝이 없는 불행의 연속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성경 어느 곳에도 남편이 아내에게 복종을 강요하라거나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을 요구하라고 가르친 곳이 없다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주께 복종하듯 복종하면 되고,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할 때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왜 하 나님께서 저런 사람을 나에게 허락하셨는가?”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저 사람을 인도해 주셨구 나!”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상대방을 들어 사용하신 사실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 다.

그리고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 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7:14) 하신 말씀의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 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변화가 상대방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녀들까지도 변화시키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야 할 때이다. 말씀에 비추어 남편으로서, 아내로서의 삶을 돌이켜야 할 때이다. 내가 먼저 변화 되는 삶을 통해 상대방도 변화된다. 그리하여 성경적 부부 관계의 회복을 통해 행복한 가정을 분명히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 어느 부부의 사랑 이야기 * 
나이 스물여덟, 남자는 어느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이 되었지요.
나이 스물여섯, 여자는 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성당에서 조촐한 출발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어느새 2년이란 세월이 흘렸지요....

그 때.. 그들에게 불행이 닥쳤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큰 불행이었어요.
그들이 살던 자그마한 집에 그만 불이 났답니다.
그 불로 아내는 실명을 하고 말았데요.
모든 것을 잃어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겐 어쩌면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 버린 셈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두 사람이 만들어갈 그 수많은 추억들을 이제는 더 이상 아내가 볼 수 없을테니 말입니다.
그 후로 남편은 늘 아내의 곁에 있었죠.
아내는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혼자 몸을 움직이는 것도 쉽지가 않았답니다.
남편은 곁에서 아내를 도와 주었지요.
처음엔 아내가 많이 짜증도 부리고 화도 내었지만 남편은 묵묵히 그 모든 것을 받아 주었답니다.
늘 그것이 미안했었나 봐요.
당신을 그 불 속에서 구해 내지 못한 것이...
그리고 그 아름다운 눈을 잃게 만든 것이 말이에요...
또 다시 시간이 흘러 아내는 남편의 도움없이도 주위를 돌아 다닐 수 있을만큼 적응을 하였지요.

그리고 이제서야 남편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죠.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서..
하나 남은 세상의 목발이 되어 주고 있음을 알게 된거죠.
이젠 다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지 않았답니다.
그렇게 이젠 둘은 아무 말 없이 저녁 노을에 한 풍경이 되어도 편안한 나이가 되어 갔답니다.
시간은 그들에게 하나 둘씩 주름을 남겨 놓았지요.

아름답던 아내의 얼굴에도 세월의 나이테처럼 작은 무늬들이 생겨 나고 남편의 늘 따사롭던 손도 여전히 벨벳처럼 부드럽긴 하지만 많은 주름이 생겨 났지요.
남편은 이제 아내의 머리에 난 하얀 머리카락을 보며 놀리곤 했답니다..

"이제 겨우 8월인데 당신의 머리엔 하얀 눈이 내렸군..."
어느 날인가 아내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답니다.

"이제 웬지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한번 보고 싶어요.
벌써 세상의 빛을 잃은지 수십년이 되었지만 마지막으로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군요.
난 아직도 기억한답니다. 당신의 그 맑은 미소를...
그게 내가 본 당신의 마지막 모습이니까요..."

남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답니다.
아내가 세상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길은 누군가의 눈을 이식 받는 것뿐이었답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가 않았죠.
아무도 이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는 아내에게 각막을 이식해 주려고 하지 않았거든요.
아내는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었지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남편은 마음 속으로 많은 생각을 했었나 봅니다.

'나 당신의 모습을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군요...'
세월은 이제 그들에게 그만 돌아 오라고 말을 전했답니다.
그 메세지를 받은 사람은 먼저 남편이었지요.
아내는 많이 슬퍼했답니다.

자신이 세상의 빛을 잃었을 때 보다 더 많이 말이에요.
그러나 남편은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나 하고 떠나기로 했지요.
자신의 각막을 아내에게 남겨 주는 것이랍니다.
비록 자신의 눈도 이제는 너무나 희미하게만 보이지만 아내에게 세상의 모습이라도 마지막으로 보여 주고 싶었던 거지요.

남편은 먼저 하늘로 돌아 가고 아내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남편의 각막을 이식 받게 되었죠.
그녀가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답니다.
늘 곁에 있던 남편의 그림자조차 말이죠.
병원 침대에서 내려와 이제 환하게 밝혀진 거리의 모습을 내려다 보며, 자신의 머리뿐만이 아니라 사람들 머리에 가득 내려 앉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정경을 내려다 보며, 아내는 남편의 마지막 편지 한통을 받게 되었답니다.

당신에게 지금보다 훨씬 전에 이 세상의 모습을 찾아 줄 수도 있었는데....
아직 우리가 세월의 급류를 타기 전에 당신에게 각막 이식을 할 기회가 있었지.
하지만 난 많이 겁이 났다오.
늘 당신은 내게 말하고있었지.
나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서...
아직 젊을 때 나의 환한 미소에 대해서 말이오. 하지만 그걸 아오? 우리는 너무나 늙어 버렸다는 것을...
또한 난 당신에게 더 이상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없다오.
당신은 눈을 잃었지만 그 때 난 나의 얼굴을 잃었다오.
이제는 미소조차 지을 수 없게 화상으로 흉칙하게 변해 버린 나의 모습을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소.
또한 우리 생활의 어려움과 세상의 모진 풍파도 말이오.

난 당신이 나의 그 지난 시절 내 미소를 기억하고 있기를 바랬소.
지금의 나의 흉한 모습 보다는...
그러나 이제 나는 떠나오.
비록 당신에게 나의 미소는 보여 주지 못하지만 늘 그 기억을 가지고 살아 가기 바라오.
그리고 내 마지막 선물로 당신이 이제는 환하게 변해 버린 세상을 마지막으로 보기를 바라오.

아내는 정말로 하얗게 변해 버린 세상을 바라 보며 중얼거렸답니다.
나 알아요.
당신의 얼굴이 화상에 흉칙하게 변해 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그 화상으로 인해서 예전에 나에게 보여 주던 그 미소를 지어 줄 수 없다는 것도...
곁에서 잠을 자는 당신의 얼굴을 더듬어 보고 알았지요.
하지만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당신도 내가 당신의 그 미소를 간직하기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난 당신의 마음 이해하니까 말이에요..
참 좋군요. 당신의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이...

그리고 며칠 뒤 아내도 남편의 그 환하던 미소를 쫓아 하늘로 되돌아 갔답니다.... 
 

Saturday, February 11, 2012

"한국 경제위기를 계기로 본 성경의 경제원리"

"한국 경제위기를 계기로 본 성경의 경제원리"

   

1. 성경에 나타난 ‘경제(오이코노미아: οἰκονομία)’의 의미

    한국에 경제위기가 닥치자, 많은 사람들이 ‘경제학이 무엇인가?’ 하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경제원론 교과서에 보면 ‘경제학은 인간의 경제행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 정의하기도 한다. 자원의 희소성(scarcity)을 전제하고 있는 경제학은 ‘사람의 필요와 소용에 따라, 희소한 자원을 최적으로(optimal) 이용하기 위하여, 행하는 선택(choice)과 행동(action)에 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소비자(consumer)의 소비경제행위와 생산자(producer)의 생산경제행위, 소비자와 생산자가 만나는 시장에서의 시장경제행위를 다루는 분야를 미시경제학(microeconomics) 이라 하고, 국가차원에서 재정정책(fiscal policy)과 금융정책(monetary policy)을 적절히 운용하여 물가와 임금, 고용, 이자율 등의 조정을 다루는 분야를 거시경제학(macroeconomics)이라고 부른다. 요즘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갖는 국제무역(international trade)도 이 거시경제학에 포함된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경제행위는 미시경제학이나 거시경제학에서와 같이 재화(財貨)와 직접·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행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광의(廣義)의 경제행위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고 하는 단어에서 보는 대로 한 나라를 움직이고 백성을 다스리고 구제(救濟)하는 전반적인 통치·행정행위를 의미한다. 공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도 말하자면 경제행위의 전반이라 할 수 있다. 수신(修身)은 개인의 경제원리(individual economic principle)요, 제가(齊家)는 가정의 경제원리(domestic economic principle)요, 치국(治國)은 국가의 경제원리(nation's economic principle)요, 평천하(平天下)는 세계의 경제원리(global economic principle)를 제시하여주는 것이다.

    경제(economy)란 말은 헬라어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에서 유래되었다. 성경에서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의 일차적인 의미는 ‘가계 혹은 가사의 경영,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한 경영, 관리 및 감독, 혹은 경영자, 감독자, 청지기(οἰκονόμος)의 직무’를 의미한다. 누가복음 16:2-4에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의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고 했는데 여기서 청지기의 사무(16:4), 청지기의 직분(16:3, 4)이 경제(經濟)란 말에 해당한다. 경제를 맡은 청지기(οἰκονόμος)는 현대적 표현으로 하면 (전문(專門)) 경제인(經濟人) 혹은 경영인(經營人)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경제(οἰκονομία)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증거의 사명 혹은 복음증거를 위한 청지기, 관리자(管理者)의 직분(職分)’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9:17에서 바울은 “내가 내 임의로 이것(=복음을 전함)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職分)을 맡았노라”고 했는데, 여기서 직분은 성경적 경제인(=복음증거자)의 사명을 뜻한다.
    셋째로, 성경에서 경제(οἰκονομία)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비된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경륜’이란 뜻을 포함한다. 곧, 하나님의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 할 것이다. 에베소서 1:9에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plan, RSV)을 위하여” (Greek 성경은 1:10...εἰς οἰκονομίαν τού πληρώματος); 3:2에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stewardship, RSV)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9에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plan, RSV)이 어떠한 것을”에서 경륜(經綸)은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의 번역인데, ‘하나님의 경제’ 혹은 영어성경이 plan으로 번역했듯이 ‘하나님의 경제 (혹은 경세제민) 계획’을 뜻한다. 골로새서 1:25에서 “하나님의 경륜(office, RSV)을 따라”고 함과 디모데전서 1:4에서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training, RSV)을 이룸보다”라고 함도 하나님의 인간구원(人間救援)이란 경세제민 (혹은 경제) 계획 또는 정책을 뜻한다.

2. 성경의 경제원리: 평균화 경제원리에 따른 공생주의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인간(소비자 혹은 생산자)의 경제원리는 극대화(maximization) 혹은 최적화(optimization)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은 효용(效用) 혹은 만족(滿足)을 극대화하는 삶을 살아간다. 현대인에게 만족의 척도는 흔히 돈의 많고 적음이다. 직장을 선택할 때도 돈을 많이 준다고 하면 다른 조건들은 대충 받아들인다. 또, 기업은 이윤극대화를 위한 경영을 한다. 더 큰 이윤을 얻기 위하여 때로는 경쟁사의 상품을 비방하고, 또 부정한 방법으로 판매이익을 늘이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제원리는 극대화(極大化)가 아닌 평균화(平均化=balanced out 혹은 averaged out)이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 주시고 그들에게 이를 거두라고 명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이 들판에서 만나를 거둘 때 어떤 이는 많이 거두고 또 어떤 이는 적게 거두었으나, 출애굽기 16:18에 보면,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고린도 교인들에게 모금하라고 할 때, 그는 하나님의 이 ‘평균(平均)의 경제원리’을 설명한다. 고린도후서 8:12-14에서,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함을 보충함은 저희의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J. Calvin)도 평균의 경제원리에 대해서 말할 때, “부한 자는 그들의 물질적 부를 가난한 자와 나누어 갖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가난한 자는 영적 부를 부자와 나누어 갖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다. 따라서 부자는 가난한 자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나누어주는 일군(διάκονος: minister 혹은 servant)이요, 가난한 자는 영의 풍요로움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종(대리자=vicar)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될 때, 그 사회는 물질적, 영적인 부가 평균화되고 모두가 형편이 더 좋아지는(better off) 사회가 될 수 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공유생활(common life: Commonism=공생주의)을 하였다. 사도행전 2:44이하에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라는 한 몸의 지체로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생활을 한 것이다. 초대교회의 공생주의(Commonism)는 평균화 경제원리에 따른 생활이다. 자본주의(Capitalism)는 각자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벌어서 자기가 번 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소비하는데, 한 가지 단점은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커진다는 것이다. 공산주의(Communism)는 각자의 능력에 상관없이 똑같이 벌어 똑같이 사용하자는 것인데, 이상적인 것 같지만 능력이 많은 사람의 일할 의욕을 저하시켜 생산성(productivity)을 떨어뜨리고 따라서 사회 전체가 빈곤(貧困)하게 된다.                                            

그러나, 평균화의 경제원리가 실현되는 사회는 개인의 능력이나 성취욕을 제한하거나 무시하는 공산주의와는 근본이 다르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하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취약점을 보완하게 한다. 평균화 경제원리의 실행은 정부나 기타 권력기관의 강제적 혹은 물리적인 법집행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린도후서 8:1-5: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 공생주의(Commonism)는 자기 능력껏 일하여 일한 만큼 벌어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 나누고 통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평균화 경제원리에 따른 삶이라 할 것이다.

3. 한국의 경제위기: 무엇이 문제인가?

    1997년 11월이후 한국이 맞고있는 이 경제위기는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暴風)같지만 사실은 그동안 쌓여온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현실로 나타난 것이라고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한국을 방문(訪問)할 때마다 느낀 의문은 ‘어떻게 한국 내에 있는 사람들의 씀씀이가 이렇게 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100불은 모처럼 마음먹지 않으면 쓸 수 없는 큰 돈인데,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서너명의 점심 한끼 값으로 10만원쯤은 큰 부담 없이 지불함을 보았다. 필자가 한국을 떠난 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아직 ‘마이카(my car)’ 시대가 아니라 고속도로 휴게소에 그렇게 개인 차량들이 많지 않았는데 10년뒤에 본 한국 고속도로와 휴게소에는 개인 차량으로 초만원을 이루고있음에 한편으로는 ‘한국경제가 이만큼 부강(富强)해졌고 국민들의 삶에 여유가 생겼구나!’ 하는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이 들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현재 한국민의 삶이 미국인이나 일본인의 삶보다도 나아졌단 말인가?’ 하는 질문이 가시지 않았다. ‘세계 최강의 경제국이라고 하는 미국인들도 전반적으로 이런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경제강국으로 급성장한 일본인들 개인의 삶은 높은 물가고로 상당히 쪼들린다고 하는데, 선진국을 향하여 발돋음하고자 하나 아직은 경제강국이 아닌 한국의 국민들만이 유독 이와같은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였다.

    어학연수라는 명목으로 상당수의 한국학생들이 유행따라 (덤으로) 유학 옴을 보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을 눈여겨보면서 과연 이러한 언어연수가 필요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내의 웬만한 영어학원에 다니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영어를 배울 수 있을 터인데, 과반수이상이 한국인들로 구성된 어학연수반의 극히 기초적인 영어수업이 생활비와 기타비용을 포함하여 년 2만불 상당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소수의 착실한 학생들도 있지만, 많은 학생들이 몰려 다니며 여행이나 즐기고 또 다른 여흥꺼리를 찾는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듦이 사실이다. 교회를 나오는 언어연수 학생들(이들은 그나마 착실한 학생들이다)에게 가끔 묻는다. 그들도 여기에서 배우는 것이 별로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연수가 마치 무슨 자격증과도 같이 회사에 취직하는데 도움이 되기때문에 온다고 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다. 이 얼마나 낭비적(浪費的)인 사회유행인가? 더욱 더 문제꺼리로 생각된 것은 S, H, D 그룹등 대기업 직원들의 언어연수이다. 이들에게는 일인당 일년에 4-5만불의 어학연수 비용이 지불된다고 하는데 어학연수를 하러 왔다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때로는 분(憤)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영어의 수준이 기초적인 것이라 아예 어떤 사람들은 수업도 적당히 걸르면서, 끼리 끼리 한국에서 못다한 골프나 치러 다니고, 물건사기와 여행으로 시간을 소모했다. 이것이 YS정부의 세계화 시책에 발맞춘 언어연수의 현주소(現住所)였다. 그러나, 의식화(意識化)가 선행(先行)되지 않은 세계화(世界化)는 꼴불견만 초래할 것이다.

    지난 해 8월에 선배 목사님의 경비까지 대주는 초청으로 선교대회 참석차 영국을 5일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영국까지 왔다가 파리(Paris)를 못보고 돌아가면 후회할 것 같아 큰 마음 먹고 자비(自費)를 들여 하루를 파리에서 머물기로 작정하고 새벽 6시 반에 떠나는 파리행 유로스타(Eurostar)를 타고 도버해협을 물밑으로 지나 세시간 만에 빠리에 도착해서 싸구려 호텔에 짐을 풀고 파리거리를 온종일 걸어다녔다. 놀라운 것은 만나는 동양사람의 80% 이상이 한국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년 남녀들에서 시작하여 30-50대 부인네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길을 걸을 때 들려오는 한국말이 반갑게 여겨지지 않은 나의 심사(心思)가 어찜인지 모를 일이었다. 관광그룹을 만나면 그들은 거의 틀림없이 한국사람들이었다. 60-70년대 일본 관광객들이 유럽을 휩쓸고 다녔다는데, 한국인이 일본인의 전철(前轍)을 밟고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날 영국으로 돌아오는 오후 1시 유로스타(Eurostar)에 30-40명씩 되는 동양인 관광그룹 두 팀이 승차했는데 두 팀 모두 한국인들이었다. 그들의 대화가 귀에 들려온다. “나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프랑스등 현재까지 아홉 개국을 구경했는데, 이번이 두 번째 유럽여행이라서 그런지 어색하지 않다. 다음에는 어디 어디를 가야겠다” 하면서 서로 자기의 여행 편력(遍歷)을 자랑하고 돈에는 전혀 구애(拘碍)됨이 없는 듯 보였다. 그들의 대화를 귓전으로 들으면서, 한국인 여행 안내원이 혹시 급행료라도 지급했나 아니면 단체 손님을 우대하는 규정이 있는지 두 그룹 모두 먼저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보다 앞서서 승차구를 빠져나감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나의 동포란 것이 자랑스럽지 않고 내가 이곳에 이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까지 여겨졌다. 나의 마음 한구석에 우려(憂慮)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한국이 이렇게 가다가는 정말 망하지?!”

    대기업과 은행들이 미국, 일본, 서방 경제선진국들로부터 상업차관(商業借款)을 도입(導入)해와서는 신규투자를 하는데 사용하는 대신에 동남아시아 국가등에 돈놀이를 해온 것도 문제이다. 인도네시아에 60억불의 채권이 있고 기타 다른 동남아국들에도 일정액의 채권이 있음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하게 된다.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 돈을 빌려준 것이 잘못이 아니라, 돈놀이해서 돈을 벌려고 한 그 의식구조가 문제이다. 한국의 외환위기는 실은 동남아의 외환위기만 아니면 안 당해도 됐을 것인데 동남아의 위기로 인해서 발생하게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당분간은 아마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꾸어준 빚을 받아서 꾸어온 빚을 갚을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건전한 경제 논리는 훗날 더 큰 화(禍)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 기업들과 한국인들중 상당수는 꾸어온 빚과 돈놀이를 함으로써 채권국인 선진국들 보다도 더 여유있는 소비를 즐기고, 어학연수와 해외여행이라는 세계화 유행을 일으키고 빛좋은 개살구모양 일등국민(一等國民) 흉내를 내왔던 것이다. 70년대와 80년대에 얻게된 부지런하고 근면(勤勉)한 한국인의 이미지가 일순간에 허물어내려짐을 당했다.

    성실함에 바탕을 둔 건전한 경제성장(經濟成長)이 바람직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간과 인내(忍耐)를 요구한다. 필자가 D실업에 입사했던 77년에 한국 수출이 처음으로 100억불을 달성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1,500억불에 이르렀음은 누가 뭐라해도 참으로 괄목(刮目)할만한 성장이다. 한번 평안함을 맛본 사람이 다시 허리띠를 동이고 뼈를 깍는 노력을 경주(傾注)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지금 우리 한국민이 감당(勘當)해야할 일이 이것 이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서민층은 금모으기, 외제품 안쓰기 등 경제회생(經濟懷生)을 위한 대국민운동에 적극 협조적인데, 일부 부유층은 이 위기를 기회삼아 사채수익과 환차익등을 올리면서 한국의 경제위기(經濟危機)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 희희낙락(喜喜樂樂)하는 현실을 어찌 할 것인가?                                                     

    대기업에서 2년여 직장생활을 하고, 정부산하 경제연구기관에서 2년 근무하면서 그당시 군인정부하라서 그랬었는지 실적을 짜맞추기 위한 경제보고를 하라는 지시를 많이 받았다. 현 경제실정이 이러이러하니까 올해 경제성장률이 몇 %가 될 것이라고 전망(展望)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성장률(經濟成長率)이 몇 %가 되게 하기 위하여 통계숫자 짜맞추기 놀음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 후에 이런 일이 없어졌나 했는데, 한은(韓銀)에 다니는 친구 얘기를 들어보니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중간간부는 그 윗 사람의 질책이 두려워서 상향조정하여 보고하고, 또 그 윗 사람은 정부의 고위관리의 힐문(詰問)이 두려워서 또 아랫 사람에게 숫자 조정을 하라고 지시하고, ..., 해서, 숫자로 나타난 경제지수와 경제현실은 동떨어져있을 때가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한국의 현 경제위기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위정자(爲政者)에게만 있는가? 재벌(財閥)에게만 있는가? 은행의 경제자료 조사파트와 경제연구기관에게만 있는가? 국민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는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재벌의 방만(放漫)한 기업경영만이 문제가 아니라, 실적주의(實績主義)가 문제이요, 국민의 과소비(過消費)가 문제이요, 인기(人氣)에 편승(便乘)하여 의식화(意識化) 없는 세계화(世界化)를 추진한 위정자가 문제이요, 이에 자신의 형편과 능력은 고려하지 않고 빚을 내가며 언어연수다 해외유람이다 흥청거린 사람들이 문제이요, 이러한 국가적 위기상황에도 자기 실속만 차리는 파렴치(破廉恥)한 특권 사치층이 문제이다.

4. 경제위기와 관련한 한국 교회의 현재와 장래

    한국의 경제위기(經濟危機)가 1997년 11월에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서서히 그리고 평안한 가운데 이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다. 예상된 극한 고난이었으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처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서서히 데워지는 물속에서 ‘아아, 따끈따끈하다’고 기분좋아하다가 뎁혀죽는 개구리처럼 그렇게 따스하고 평안한 가운데 위기가 소리없이 한국민(韓國民)에게 찾아왔다. 올해 실업자(失業者)의 수가 200만명이 넘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선진국처럼 실업대책이 잘 된 나라에서도 이와같이 갑작스런 대량실업이 발생하면 그 대책이 어려운데 실업대책이 미비한 한국은 어떤 수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한국 경제와 사회에 위기의 조수(潮水)가 서서히 밀려들어 목부위를 넘어 입가에 이를 때까지 목청을 돋구워 선지자노릇을 해야 했을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들 역시 실적주의와 외형주의에 앞장 섰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들이 발표하는 교인숫자를 다 더하면 한국 총인구숫자 보다도 많다는 말이 있다. 헌데, 그 말이 사실이다. 교인의 숫자가 30,000여명이 된다는 교회를 연속 2주 출석해보았다. 5부 예배를 드리는 교회였는데, 후하게 쳐서 꽉 차면 2,000명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의 교회인데 교인수가 30,000여명이라고 공식 발표하니 이것부터 교인 수의 거품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교회가 되면 무엇하겠단 말인가? 누구를 위한 숫자 놀음인가? 주님을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당회장(堂會長) 목사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 할 것이다.

    불우한 이웃을 돕기에 앞장설 교회들이 이러한 일에는 푼돈으로 하고, 성도의 헌금의 대부분을 대형 성전 새로짓기에 사용한다. ‘우리의 경쟁상대 교회가 얼마를 들여서 얼마만한 교회건물을 지었는데 우리가 질소냐? 우린 좀 더 크게 짓자!’ 열심히 거두어 들인다. 어느 교회는 마이크 시스템만 몇 천만원짜리라 하여 입을 크게 벌렸었는데, 어느 새로 대형성전을 건축하는 교회에서는 1억여원을 들여서 마이크 시스템을 갖춘다는 신문기사를 보면서 분한 마음이 듦은 어떤 연유인가? 시기하는 마음일까? 이것이 외형주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100만명이상이 이미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내몰리고 있는데, 한국에서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해야할 교회들이 그들을 위해 마련하는 대응책이 무엇인가? 그들은 대답한다. ‘교회의 사명은 육적인 배고품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궁핍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맞다. 그러나,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그러면, 영적인 배고품과 목마름을 채워주고 있는가? 한국의 대형교회에서는 신앙은 모범이나 가난하면 장로도 될 수 없다. 어떤 교회에서는 1,000명의 권사후보를 추천하고는 그들에게 기부금을 내라고 한다. 일정액의 기부금을 낼 형편이 못되는 사람은 권사가 될 수 없다. 본인이 (명예) 직분에 감사하여 예물을 드림이야 누가 뭐라겠는가만, 일정 액수가 직분자가 되기 위한 한 조건이어서야 어찌 하겠는가? 이것이 영적인 갈증과 허기를 채워주는 교회의 모습인가? 대통령 조찬기도회에 뽑혀서 갔다온 목사님들은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렇지, 역시 나는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 교계의 지도자이지!’ 그러나, 그 목사님들이 한국의 영적 지도자로서 대통령을 만나서는 무슨 건의를 드렸는가? 대통령의 아들이 온갖 인사에 관여하고, 이권에 개입하고, 대기업들을 주무르고, 안기부에 자기 직계를 마련해 놓았다는데 그것이 대통령과 다른 아무도 모르게 어느날 갑자기 되어질 수 있는 일인가? 영적인 지도자라는 소리는 듣고 싶어하면서, 어찌 영적인 지도자의 역할은 감당하고자 하지 않는가?

    한국의 경제위기를 계기(契機)로 한국 교회들이 새로운 각성기(角星祺)로 접어들어야 할 것이다. 신사참배(紳士參拜)와 같이 하지 않을 것을 한 것만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니라, 영적 책임을 맡은 교회들이 한국민과 사회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도 큰 죄(罪)이다.  그들 (모두는 아닐 것이지만) 스스로가 망국(亡國)의 길에 앞장을 섰으니 철저히 회개(悔改)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한국의 경제위기를 넘기는데 앞장서야 한다. 그 해결책이 무엇인가? 건전(健全)한 경제원리와 정책의 해법이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경제원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경제계획이 무엇인가’ 말씀해주고 계시다.

    하나님의 경제계획(=경륜)은 인간구원(人間救援)이라고 했다. 이 시대상황(時代狀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의 경제계획도 인간구원이다. 영적인 구원이 물론 일차적인 목표이지만, 경제적 빈곤(貧困)으로 신음(呻吟)하고 자살(自殺)로까지 치닫는 이웃을 외면(外面)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양의 반열(班列)에 선 사람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태 25:35-36) 말씀하실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교회가 모으기에 열심이었다면 이제는 ‘나누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재벌(敎會財閥)로서 발돋음하고 대형교회 목사라는 특권의식을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그 모범을 따르는 진정한 주의 종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균(平均)의 경제원리’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첫째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그렇다. 다섯 개의 떡덩이와 두 마리의 물고기는 한 사람의 점심식사 분량이지만 이를 떼서 나눌 때 5,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에 남기는 기적이 일어났다. 주님의능력을 믿고 선포하는 교회는 인간의 얕은 계산방법을 버리고 주님의 경제원리에 따라 경세제민(經世濟民)에 앞장서야 한다. 둘째는, 예수님의 생애(生涯) 자체가 평균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말씀한다.  대형교회는 ‘주님의 이름’이라는 미명(美名)하에 교회의 부(富)를 자신의 몸체 불리기에 무익(無益)하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원래 부요(富饒)한 자이나 가난하게 되신 주님의 모범(模範)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 위에 교회는 크리스천의 경제윤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것은 부정한 이익을 취함이 아니요, 지나친 낭비의 삶을 사는 것도 아니요, 근면하고 분수에 맞는 적절한 삶을 사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허례허식의 삶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건전하고 모두의 형편이 좋아지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지혜롭고 선한 청지기(=경제인 혹은 경영인)의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나에게 주어진 재물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므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시간 역시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므로 부지런히 내게 맡기신 달란트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서 경영(經營)하는 삶을 살도록 교회가 앞장서서 가르쳐야 할 것이다.



           (1998년 6월 6일부터 7월 11일까지 미주크리스찬 신문[The Christian Press]에 게재)


"제비뽑기에 관한 성서적 고찰"

"제비뽑기에 관한 성서적 고찰"


    교회의 제직선출이라든가 기타 교회의 중요한 사업 결정에 제비뽑기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목사님들이 있다. 과연 교회 내에 구약성경에 종종 등장하는 것과 같은 제비뽑기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혹, 그렇다면, 제비뽑기는 어떠한 경우에 어떠한 목적으로 활용해야 할까? 이와 관련하여 성경과 사해문서(Dead Sea Scrolls) 속에서의 제비뽑기의 용례와 그 변천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제비뽑기의 어원적 의미
    제비뽑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랄'의 본래의 문자적 의미는 제비뽑기를 위해 사용된 조약돌 혹은 작은 돌이다. 의혹이나 다툼이 있는 경우, 몇몇 사람이 나누어가질 몫이 있을 때, 제비뽑기로 결정하는 관습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백성들만 행했던 관습이 아니라, 이스라엘 이외 다른 고대의 중·근동 국가들과 헬레니즘 문화권의 국가들과 또한 라틴 문화권의 국가들에서도 행해졌다. 똑같은 제비뽑기지만 그들이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들의 관습, 문화, 환경과 믿음에 따라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를 그들이 갖고 태어난 운명 혹은 그저 그들 앞에 우연히 전개된 재수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제비뽑기의 결과를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위한 섭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유대인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공정한 응답을 주시리라는 기대감으로 제비뽑기가 사용되었다. 제비뽑기의 방법 혹은 형태에 대해서는 구약성경에 분명한 서술이 없다. 이 제비뽑기에 사용된 도구(예를 들면, 주사위 같은 것)는 용기에 담겨져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2. 구약성경에서의 제비뽑기의 개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비뽑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분명하게 계시하시리라고 믿었다. 꿈이나 선지자들의 예언과 함께(삼상 28:6),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응답이요 최종적인 결정으로 받아들여졌고, 해서 어떠한 항소도 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제비뽑기를 자주 사용했는데, 특별히 공평한 결정을 얻기 위해 사용했다. 게다가, 제비뽑기는 이용하기가 쉬웠고, 해석함에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와 성전에서의 예식적인 제비뽑기는 점차적으로 예언적 설교와 토라(모세5경: 하나님의 지시사항)의 제사장적 해석으로 대체되어졌지만(호세아 4:12), 일상생활면에서는 계속적으로 행해졌다. 성례의 제비뽑기인 우림과 둠밈은 제사장의 규례가 마련될 때 즈음에는 그 본래적 기능을 상실하고, 다만 대제사장의 재판 권한의 상징으로 그의 의복 속에 넣어 간직되었다.
    구약성경에서의 고랄은 ① (각 지파와 가족에 대한) 토지분배(민수기 26:55,56; 여호수아 18:6,, 21:4)를 위해서 행하는 제비뽑기; ② 할당되거나, 분할되거나, 지정된 것--특히 토지의 할당된 부분 그 자체(여호수아 15:1, 16:1, 17:1, 시편 125:3, 미가 2:5); ③ 봉사, 의무나 징계를 지우기 위한 제비뽑기(레위기 16:8, 역대상 24:5, 느헤미야 11:1, 사사기 20:9, 요나 1:7, 나훔 3:10, 오바댜 11, 요엘 3:2), ④ 보상 혹은 보응(=몫)(이사야 17:14, 예레미야 13:25, 다니엘 12:13); ⑤ 인간의 분깃, 운명 혹은 운, 하나님의 결정(시편 16:5, 이사야 34:17)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사해문서에서의 제비뽑기의 개념
    사해문서에서 고랄은 구약성경에서와는 다소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문자적인 의미로서 제비뽑기 행위의 뜻으로 사용되었다기 보다는 은유적 혹은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사해문서에서의 고랄은 여러 가지 상징적 혹은 은유적인 뜻을 갖고 있는데, 그 주요한 것들은 ① 인간의 운명, ② 종말론적 보상과 보응(징계)으로서의 몫, ③ 하나님의 결정을 반영하는 공동체의 결정, ④ 빈도나 횟수(times), 혹은 때(time)의 의미 등이다. 쿰란(Qumran) 문서의 이원론적 성격으로, 이는 또한 집단, 떼, 파당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자신들을 빛의 자녀들, 의의 자식들이라고 여긴 쿰란공동체 사람들의 종말론적 소망이 이 고랄이라는 단어에 담겨져 있다.

4. 신약성경에서의 제비뽑기의 개념
    신약성경에서 히브리어 고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이로스(κλήρος)는 주로 제비뽑기를 의미한다(마가 15:24, 행전 1:15-26). 사도행전 1:26에서 보는 바와 같이 초대교회 사도들과 제자들은 가룟유다를 대체할 사도를 선택하기 위하여 제비뽑기를 했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적인 제비뽑기였는가 혹은 아니였는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쟁이 있다. 대부분의 성경주석가들은 제비뽑기가 빈번하게 사용되어져 왔으므로 유대사회에서 사도의 선출에도 그러한 방법이 기대되었을 것으로 보지만, 부분적인 증거는 “제비뽑기에 의한 중요한 직분자의 선택이 이방 헬레니즘 사회에서는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었으나 유대주의에서는 기대되지 않았다”고 반론한다. 베얼즐리(W. A. Beardslee)는 종말론적 유대인들의 집단인 쿰란공동체가 제비뽑기를 은유적 의미(lot-metaphor)로 사용했다고 지적하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도 제비뽑기를, 쿰란공동체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결정에 대한 거울로서 공동체에 의한 결정의 의미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5.  결어: 교회 내에서 문자적 의미의 제비뽑기는 유익한가? 그 한계는?
    우리는 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결정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우리 앞에 밝히 보일 때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경우에는 아무리 기도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 알 수 없는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세기 교회 내에서의 제비뽑기의 사용이 보다 겸손하고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함이라면 이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 이미 하나님의 모든 섭리와 계획을 아는 채 하면서, 제비뽑기를 사용한다면, 이는 유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교회에 심각한 해를 가중시키는 결과만 낳을 것이다.
    제비뽑기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성경말씀 속에서, 기도를 통하여, 환경 속에서, 제 삼자를 통하여, 혹은 하나님의 작고 세미한 음성으로부터 하나님을 깨달아 알려고 힘쓰다가 도저히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깨달아 알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제비뽑기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알게 하심을 믿고 이를 행할 수 있으면, 제비뽑기란 방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그러한 겸비한 마음을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그 분의 뜻을 알게 하시리라 믿는다.
    제비뽑기는 만능이 아니다.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을 알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궂이 이를 실시하여 혼선을 빚을 필요 또한 없다. 구약성경에서 제비뽑기를 실시한 경우의 대부분이 의혹이 있는 때, 혹은 사람이 임의로 결정하면 다툼의 소지가 있는 때였다(지파간 토지분배, 성전에서 봉사의 일, 제사장의 성소에 들어가는 일등).  교회 내에서, 제직을 선출할 때에, 교인들이 어느 정도인선하여 안수집사후보나 장로후보의 수를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의 수에 어느 정도 접근시켰을 경우에 제비뽑기를 사용하면 이는 유익을 줄 수 있다. 웬만한 목회자라면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자리인 노회장이나 총회장의 선출에 적당한 후보자를 먼저 인선한 다음에 이들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실시한다면 이는 유익이 될 것이다.

    기도하고 실시하는 제비뽑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할 바가 없다. 반면에, 기도하고 행사한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한 결정에 승복하지 못하는 사람이 기도하고 제비뽑기를 했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다. 설령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재수’로 돌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교회의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문자적인 제비뽑기의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않을 것인가 보다도, 문자적 제비뽑기이건 상징적 제비뽑기(사람의 믿음의 결정을 하나님의 결정으로 받아들임)이건 우리가 그 결과에 승복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1996년 6월 1일-8일 미주크리스찬 신문[The Christian Press]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