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pril 11, 2012

“샬롬”에 관하여

“샬롬”에 관하여


히브리어 '샬롬'은 “평안, 평강, 평화, 화평, 화목” 등의 뜻으로서 히브리 사람들의 인사로 흔히 사용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났을 때 또는 편지 서두에 사용하면, “그동안 평안히 지내셨습니까?” “별고 없이 지내셨습니까?”라는 뜻이고, 헤어질 때 또는 편지 말미에 사용하면, “평안히 지내세요” “(건강을 포함하여) 평안하세요”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편지 끝보다는 처음에 인사말로 많이 사용합니다.
하나님과 관련하여서는 “하나님의 평안(=평강)이 당신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정도의 의미라고 생각하면 문안합니다.

구약성경에서는 전쟁의 용어로도 사용되었는데, 외진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평안이뇨?(=샬롬?)”이라고 묻기도 하였는데, 곧 ‘나를 헤칠 의사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인사’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전쟁 중에 적진에서 병사가 다가올 때, “평안이뇨?” 물음으로써, 전쟁의 목적으로 오는 것인지 화친의 목적으로써 오는 것인지 확인하기도 하였습니다(왕하 9:18, 19, 22 참고).

신약성경에서는 주로 바울의 서신들에서 처음 인사말로 사용되었습니다(롬 1:7; 고전 1:3; 고후 1:2; 갈 1:3; 엡 1:2; 빌 1:2; 골 1:2; 살전 1:2; 살후 1:2; 딤전 1:2; 딤후 1:2; 딛 1:4; 몬 1:3).
바울의 서신의 말미에서는 가끔 축복을 기원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고후 13:11; 갈 6:15; 엡 6:23; 살전 5:23; 살후 3:16; 몬 1:20).

베드로도 베드로전서(1:2)와 베드로후서(1:2)에서 각각 인사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샬롬이 히브리인들의 인사말인 반면에, 헬라인들은 주로 “은혜”(카리스, χάρις)란 말로 인사를 했다고 합니다.

바울의 서신들과 베드로의 서신들의 인사말에는 “은혜”와 “평강(=평안)”이 꼭 같이 사용되었는데, 이는 히브리인들과 헬라인들을 다 포함한 인사라기 보다는,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은혜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평안”으로 인사하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장 16절에서 바울은 “평강의 주”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리스도인의 평강(=평안)의 근원(根源)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평안(=샬롬)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은 곧 주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입니다.
 
 

정경(Canon) 형성에 관하여

정경(Canon) 형성에 관하여


구약시대에 기록되어진 성서들이 많이 있는데 이들 중에 특별히 신뢰할만한 성서들을 선별하여 정경 속에 포함시킨 작업은 주후 90년경 얌니아(Jamnia) 회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구약과 마찬가지로 신약시대에도 많은 성서들--복음서, 서신들, 교훈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어떤 성서들은 저자의 이름을 밝히고 있으며, 어떤 서신들은 익명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저자의 이름이 알려진 것 가운데서도 실제 저자는 다른 경우도 있었습니다.
신약의 정경화 작업(canonization)은 2세기 중엽의 이단인 마르시온(Marcion)에 의하여 처음 시도되었다는데 대체로 동의합니다. 마르시온은 누가복음을 그의 유일한 복음서(Gospel)로 삼았으며, 바울의 서신들 중에 목회서신(디모데전-후서, 디도서)을 제외한 나머지 열 서신(이중에 ‘에베소서’는 ‘라오디게아서’라는 이름으로)으로 사도서(Apostolikon)로 삼아 이 열한 권만을 정경(Canon)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God of Israel, Creator, Demiurge)과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Unknown foreign God, Father of Jesus)가 다르다고 믿었기 때문에 구약은 배척하였습니다.

마르시온의 정경에 자극을 받은 로마의 정통교회(Catholic Church)도 교부들을 중심으로 서둘러서 정경화 작업을 하였는데, 이때 이레니우스(Irenaeus)는 누가복음 이외에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도 정경에 포함되어야 함이 마땅하고, 바울의 목회서신--디모데전-후서, 디도서--과 요한의 서신들, 베드로의 서신들 등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이후에 계속하여 어떤 성서들을 정경에 포함시킬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는데, 20-30권의 성서들이 포함되었다가 제외되었다가 하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복음서와 바울서신들, 요한일서, 베드로전서 등은 대체로 진품인을 인정받았지만, 요한2서, 요한3서, 베드로후서, 야고보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등은 교부들과 시대에 따라서 진위가 엇갈리며 포함-제외의 과정을 거듭한 것입니다.

그러다가,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주후 367년에 현재와 같은 순서의 신약을 처음 그의 서신에서 언급하게 되었고 그 이후에는 대체로 이를 받아들이는 추세이었습니다. 물론, 동방의 교회들과 서방의 일부 교회들에서는 나름대로 여전히 다른 권수의 정경을 갖고 있었지만 현재의 정경이 완성된 것은 아타나시우스 때라고 보면 됩니다.

정경(Canon)은 구약과 신약의 많은 성서들 중에 그 저작이 진품이며, 성경의 일관된 교리들에서 벗어나지 않는 성서들로서,  ‘Canon'이란 말의 의미는 ’기준, 표준'이 되는 것‘(criterion)이란 뜻입니다. 많은 성서들 중에 이 정경이 특별히 권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크리스천 삶과 판단의 기준이 됩니다.
 


“이슬람”에 관하여

“이슬람”에 관하여


이슬람 교도들이 귀하게 여기는 '지하드'(Jihad)는 주로 '성전(=holy war)이라고 번역되는데, 이는 '애쓰다, 투쟁하다'(=struggle의 의미)에서 온 것으로 '항상 최선의 노력을 다한다'는 의미입니다. 이슬람 교도들은 그들의 유일하신 하나님인 '알라 신'(곧, 유대교와 기독교의 여호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 위하여 그분께 복종하고 최선의 노력을 하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과격한 이슬람교도들에게서 느껴지는 호전적인 모습은 그들의 잘못된 경전의 이해이거나 잘못 비춰진 그들의 모습입니다.
이슬람 신앙에서의 예배의 핵심은 기도(=Salat)입니다. 그들은 하루에 다섯 차례-아침 기도, 정오 기도, 오후 기도, 일몰 기도, 밤 기도 등이 있습니다.

이슬람교의 시작은 무함마드 (마호메드 또는 모함메드, Muhammed, -ad, or Mahommet, -ed, or Mohammed, 570-632)에 의하여 주후 622년부터입니다.
"이슬람(Islam)"의 뜻은 '복종'입니다. 므슬림(Muslim)은 이슬람 교도들입니다. 므슬림 신조의 첫 번째 절은 "나는 알라 이외에는 신이 없음을 증언한다"고 되어 있고 이 신조의 보완적인 뒷 부분은 "나는 무함마드가 알라의 사자임을 증언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경전인 코란(Qur'an=Holy Book)은 11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의 시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Chapter 1.   Al-Fatihah (Opening) (revealed before Hegira)
 1. With the name of Allah, the Most Gracious, the Ever Merciful,
    (I commence to read the Holy Book)
 2. All type of perfect and true praise belongs to Allah alone,
    the Lord of the worlds,
 3. The Most Gracious, the Ever Merciful,
 4. Master of the Day of Requital.
 5. (Lord!) You alone do we worship and You alone do we implore for help.

 (1장. 서장, 무함마드가 Mecca에서 Medina로 도피한 Hegira (Hijrah) 이전에 계시되다)
  1. 가장 은혜로우시며, 항상 자비하신 알라 신의 이름으로
     (나는 경전을 읽기 시작합니다.)
  2. 모든 종류의 온전하고 진실한 찬양은 모든 세계의 주님이신 알라 신에게만
     속한 것입니다.
  3. 가장 은혜로우시며, 항상 자비하신,
  4. 보수(또는 보복)의 날의 주님,
  5. (주님!) 우리는 당신께만 예배드리며, 당신께만 도움을 간청합니다.)

코란의 3장 19절에서는 "알라 신에게 열납되어지는 참된 믿음은 이슬람뿐이다"(=Decidedly, the true Faith acceptable to Allah is Islam)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코란에서 예수님(=이사, `Isa)은 위대한 선지자 정도로 여겨집니다.

이슬람교도들은 무함마드를 비롯하여 (주로) 아랍인들로 유대교와의 갈라짐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갈과의 사이에서 나은 이스마엘로부터 갈라집니다.

구 예루살렘(Old Jerusalem)의 중심에 황금색 지붕을 한 '엘 악사 모스크'와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린 바위라고 전해 내려오는 큰 바위를 담은 '오마르 모스크'(Dome of Rock)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랍인들은 지금도 이곳을 성지로 여기고 찾아와 맨발로 절을 하며 예배드립니다. 이 오마르 모스크 안에 있는 큰 바위 바로 밑에서 무함마드가 이상 중에 바위를 뚫고 승천함을 체험하였다고 이슬람 교도들은 주장합니다. 물론 무하마드의 승천은 육체적 승천은 아닙니다.
구 예루살렘을 둘러싼 벽 (1,500년대에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서 건설되었다는 성벽) 안에 헤롯 성전(그전에는 솔로몬 성전의 자리)의 잔재인 통곡의 벽(Wailing Wall 또는 Western Wall: 헤롯성전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다 무너져 내리고 성전을 둘러쌓던 벽들 중에 서쪽 벽만이 남아 있음)과 예수님께서 두 강도들과 죽으셨다는 장소와 묘실(Holy Sepulchre)이 있습니다. 해서, 이곳은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이 다같이 공히 성지로 여기는 장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이들 간의 갈등은 계속될 것으로 보입니다.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에 관하여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에 관하여

 
예수님의 천국(=Kingdom of Heaven: 마태복음 용어,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 나라=Kingdom of God) 비유의 가장 상세한 내용은 마태복음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4곳에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누가복음 13:18-21에 두 개(겨자씨, 누룩)의 하나님 나라 비유가 나오고 누가복음 14:15-24에 혼인잔치의 비유와 19:11-27에 므나 비유가 나옵니다.

예수님의 천국비유 또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천국/하나님 나라가 어떤 곳인가를 설명하고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천국/하나님 나라의 (지상에서의) 임함과 확장, 그곳을 얻기 위한 사람들의 사모함이나 열정, 천국/하나님 나라에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가, 천국의 임함의 기다림 등에 관한 비유입니다.

누가복음 13:18-19에서 하나님 나라를 겨자씨 한 알에 비유한 것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시작(또는 크리스천 믿음의 시작)이 겨자씨 한 알만큼 작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작은 겨자씨 한 알만한 하나님 나라(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믿음)의 시작이었지만 후에는 그것이 큰 나무(겨자나무는 그렇게 커진다고 함)가 되어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을 의미합니다.

누가복음 13:20-21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누룩에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성장에 관한 비유로 복음이 사람의 마음 속에 또는 삶 속에 은밀하게 스며들어 점점 확장되어짐을 의미함입니다.
그러나 누가 13:18-19와 20-21 모두 교회 안에서의 양적 성장이 영적 성장으로 뒷받침되지 않을 때, 오히려 위험을 가져올 수 있음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무성한 겨자나무에 깃드는 공중의 새들은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질적인 풍부가 아닐 수 있으며, 또한 누룩(예수님은 누룩을 다만 부풀어지는 또는 풍성하여지는 속성을 설명하기 위하여 사용하심)이 전부 부푸는 것도 영적인 풍성함이 아닐 때에는 오히려 해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숫적 풍성함이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영적 축복과 은혜의 풍성함이 아닐 수 있듯이).

보다 더 상세한 천국/하나님 나라의 비유가 나오는 마태복음에서의 천국비유를 나열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마태 13:3-8/18-24..."(천국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예수님의 유명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도 천국 비유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씨는 다름 아닌 "천국 말씀"(13:19)입니다. 천국 말씀을 듣고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 결실을 거둔 사람이 천국 백성이 되기에 합당한 자입니다.)

2. 마태 13:24-30..."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좋은 씨를 뿌리는 이: 인자, 밭: 세상, 좋은 씨: 천국의 아들들, 가라지: 악한 자의 아들들, 가라지를 심은 자: 마귀, 추수 때: 세상 끝, 추숫군들: 천사들)

3. 마태 13:31-32(비교: 누가 13:18-19/마가 4:30-32)..."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겨자씨: 천국의 시작[크리스천 믿음의 시작]이 작음을 의미, 나무가 됨: 천국의 외적 성장, 공중의 새들: 천국[또는 교회]을 찾아 깃드는 사람들)

4. 마태 13:33(비교: 누가 13:20-21)..."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인간의 삶 속에서 은밀하게 스며들어 점점 확장되어갑니다. 누룩은 하나님 나라의 내적 성장을 설명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의 양적 성장이 영적 성장으로 뒷받침되지 않을 때, 오히려 위험을 가져올 수도 있습니다.)

5. 마태 13:44..."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이 보화와 같은 천국의 비밀을 발견한 사람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팔아서라도 얻고자 합니다.)

6. 마태 13:45-46..."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4절과 유사한 비유)

7. 마태 13:47-50..."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어부의 그물에 각종 고기들이 걸리지만, 그물에 걸린 고기들은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마지막 때],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천국에 들어가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립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물은 각종 사람들이 모여든 교회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8. 마태 18:23-35..."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하나님은 일만 달란트 빚진 우리 각 사람의 빚을 탕감해 주셨는데, 우리 중 어떤 이는 그 빚졌다가 탕감받은 동관과도 같이 자기 주위 사람의 사소한 빚[=잘못]을 용서해줄 줄 모릅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그의 용서를 거두어 버리십니다.)

9. 마태 20:1-16..."천국은 마치 품군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으니..."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하시는 셈의 방법은 우리 인간의 셈과 같지 않습니다. 늦게 믿은 자[=일하러 포도원에 온 자]도 먼저 믿은 자와 똑같은 구원을 얻습니다. 오히려, 먼저 된 자가 하나님의 셈 방법에 불평할 때, 나중 된 자를 더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10. 마태 22:2-14(비교: 누가 14:15-24)..."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어떤 임금[=하나님]이 종들[=선지자들]을 보내어 자기 아들[=예수님]을 위한 혼인잔치[=천국잔치]에 사람들[=선택받은 이스라엘]을 청하였으나 그들이 거절하였습니다. 이에 종들을 다시 사거리에 내보내어 사람들[=이방인들]을 만나는 대로 혼인잔치에 청합니다. 이중 어떤 사람은 예복을 입고 왔으나[=그리스도를 만날 준비를 갖춘 크리스천], 어떤 사람은 예복을 갖추지 않고 왔습니다. 이 때, 임금은 예복을 입고 오지 않은 사람들은 바깥 어두움으로 내어 쫓습니다.)

11. 마태 25:1-13..."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러 많은 크리스천들이 기다리고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미련한 다섯 처녀와 같이 등은 준비하되 등을 계속 타게 할 기름[=영적신앙생활 지속의 요소]을 가져가지 않아 깨어있지 않고 졸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슬기 있는 다석 처녀와 같이 준비된 마음과 믿음으로서 깨어서 기다리고 있다가 신랑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게 됩니다.)

12. 마태 25:14-30 (비교: 누가 19:11-27)..."(천국은)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어떤 사람[=예수님]이 타국[=천국]에 갈 때 그 종들[=믿는 사람들]에게 그 능력에 따라 달란트[=직분]를 맡겼는데, 그 주인이 돌아왔을 때[=재림] 어떤 사람은 자기의 달란트를 잘 경영하여 칭찬을 듣고, 어떤 사람은 게을리 하여 어두운 데로 내어 쫓김을 당합니다.)

 

반유대주의(Anti-Semitism)에 관하여

반유대주의(Anti-Semitism)에 관하여



누가 예수님을 죽였는가? (Who Killed Jesus?)
먼저, '예수님을 누가 죽였는가'란 질문을 해볼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위시하여 사도행전, 그리고 바울서신은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로 본디오 빌라도와 로마병정들보다는 유대인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2절에서 "(유대인)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 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셨을 때, 빌라도는 할 수만 있으면 예수님을 죽이지 않고자 해서 유대인들에게 '바라바와 예수님 중에 한 명을 놓아줄 것'을 선택하게 하였지만, 그들은 끝내 예수님 대신에 무법한 강도 바라바를 놓으라고 종용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세 번씩이나" "나는 (예수에게서)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 놓으리라"(눅 23:22)고 했지만, 유대인들은 끝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였"습니다(눅 23:22).
그들은 빌라도에게 끊임없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못 박으소서"(마태 27:22, 23; 마가 15:13, 14; 누가 23:21, 23; 요한 19:6, 15)를 외쳤습니다. 또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를 주저하는 빌라도에게 "그 피를 우리(=유대인들)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라고 하여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결단하게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2장 23절에서 베드로는 유대인 무리에게 "너희(=유대인들)가 법 없는 자들(=빌라도를 비롯한 로마인들)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사도행전 7장 52절에서 스데반도 "이제 너희(=유대인들)는 그 의인(=예수님)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라고 하여 유대인들이 의인이신 예수님을 죽였음을 지적하였습니다. 또한 바울 역시 데살로니가전서 2장 15절에서 직설적으로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 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 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라고 했습니다.
이쯤 하면, 성경이 '예수님을 누가 죽였다'고 하는지 알 수 있겠지요.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인 책임이 없는가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일차적 책임자라고 한다면, 십자가형을 언도한 빌라도는 이차적 책임자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당시 그 자리에 없었기는 하지만 (아담과 가인의 죄성을 지니고 있는) 모든 사람들도 심정적으로 예수님을 죽이는데 동참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죽인 책임은 대를 이어서 내려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바울은 이를 로마서 5장 6절, 8절과 10절에서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6절),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8절)와 "우리가 아직 원수 되었을 때에"(10절)란 말 가운데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유대인들을 용서하셨는가?
누가복음 23장 34절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심으로 이미 유대인들의 (그를 못 박음에 내어준)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가르침이 무엇입니까?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 6:44)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누가복음 6장 27-28절에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데반도 그를 돌로 치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기도하되,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전 7:60)라고 간구했습니다.

'반유대주의(Anti-Semitism)'란 무엇인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서 지적하는 것은 '반유대주의(Anti-Semitism)'가 아닙니다.
위에서 살펴본 바대로, 베드로도(행전 2:23), 스데반도(행전 7:52), 그리고 바울도(살전 2:15 등)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반유대주의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는 자기들의 동족을 안타까움과 연민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향하여 호소한 사람들입니다.

'반유대주의자(Anti-Semitists)'의 대표적 인물로서 히틀러(Adolf Hitler)를 꼽습니다. 로마카톨릭 신자였던 그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 유대인들을 증오하는 마음으로 600만의 유대인을 대량학살한 살인마였습니다.
'반유대주의(Anti-Semitism)'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였다'는 이유로 또는 '유대인이면 왠지 모르게 밥맛이 없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을 저주하고 증오하고 무조건 싫어함을 말합니다. 셈의 후손이 하나님의 가장 축복받은 족속인데, 이 셈족의 대표격 민족인 유대인들을 여러 가지 이유로 싫어함이 '반유대주의(Anti-Semitism)'입니다.

'반유대주의(Anti-Semitism)'는 어떤 명분으로라도 성경적인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사람들'도 유대인들이었지만, '세상 사람들에게 (유대인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한) 복된 소식(=복음)을 전한 사람들'-바울도 바나바도 마가도, 베드로와 요한도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5장 27절에서 "저희(=아가야와 마게도냐로 대표되는 이방 크리스천들)는 그들(=유대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유대인들)의 신령한 것(=복음)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유대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에 관하여

삼위일체에 관하여


삼위일체(Three Persons in One Nature)에 관하여 잘 설명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삼위(Three Persons)--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나님의 속성(One Nature) 안에 모두 계시다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자칫 잘못 성명하면, 이단으로 몰리기 쉬운 주제이기도 합니다 (예: 양태론, Modalism).
한 분 하나님의 형상을 그리면, 그 전체가 하나님이시며 성부(=아버지)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한 분 하나님의 말씀을 성자(=아들)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한 분 하나님의 생각, 지혜 혹은 영을 성령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창세기 1장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신(=영)이 태초 때부터 "수면에 운행하셨으며" 하나님께서 말씀으로(=성자 하나님과 더불어, "가라사대" 1:3, 6, 9, 11, 14, 20, 22, 24, 26, 29; "(말씀)하시고"...1:6, 15, 22, 26, 28, 30)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곧, 삼위의 하나님께서 창세 이전부터 계시고 함께 천지와 공중과 바다와 땅위의 생물과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삼위가 하나인 것은 하나님께서 역할과 그 교통하심에 따라서 때로는 성부(=아버지) 하나님, 성자(=아들) 하나님, 성령 하나님으로 불리우지만 한 분 하나님의 형상(혹은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하나님--하나님의 지혜에 관하여는 잠언 8장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지혜가 태초 전부터 여호와 하나님(여기서는 성부 하나님과 거의 동일 개념)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 성령 하나님께서 나의 속에 계셔서 하나님의 사정과 생각을 알게 하시고, 나의 사정과 생각과 간구를 하나님께 전달하여 주십니다(=성령의 교통하심). 하나님의 속 사정을 알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서는 고린도전서 2장 10-1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내' 안에 성령이 계셔야 할 것은 그리할 때만 하나님의 마음과 생각을 헤아려 알 수 있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 곧 성자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고 증거되어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One Nature of God)고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성자 하나님이신 말씀(=성자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2,000년전 유대땅 베들레헴에 태어나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성자 하나님)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성자 하나님이 하나님을 우리 인간에게 더 자세하게 알려 주시기 위하여 육신의 몸을 입고 2,000년 전에 우리에게 오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까?
예, 예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온전하신 하나님이시요, 온전하신 사람이십니다 (즉, 예수님은 반은 하나님이시고 반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런 고백이 어디에 있습니까?
요한복음 20장 28절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본 도마는,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신앙고백하였습니다.
또한 요한계시록 1장 8절에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삼위의 하나님이 일체되심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2장 4-6절에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임은 여러 가지나 주(=성자 하나님)는 같으며, 또 역사는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성부 하나님)은 같으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에베소서 4장 4-6절에서는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만유의 아버지시라. ..."고 함으로써 성령, 주,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한분 되심을 강조합니다.
또한 창세기 1장 26절에는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고 복수(=성부, 성자와 성령의 삼위)로 표현되어 있고, 1장 27절에는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을 따라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라고 단수(=한분 하나님)로 표현되어 있는 구절들로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금생(今生) 이후의 세계에 대한 성경적 고찰

금생(今生) 이후의 세계에 대한 성경적 고찰



유대인들은 영혼의 불멸은 대체로 믿어왔으나 육신의 영속성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사람이 죽으면 하나님을 잘 믿던 자이거나 그렇지 못한 자이거나 다 음부(=스올:שׁאול)로 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스올라고 하는 음부는 우리가 사는 땅의 아래에 있는 것이라고 믿어졌습니다(창 37:35; 민 16:30; 신 32:22; 삼상 28:13; 욥 14:13, 17:23, 38:17).

고대 근동(The Ancient Near East, ANE)의 문학에서도 이 죽은 자들의 지하세계(=the Nether World)에 대해서 다루고있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Descent of Ishtar to the Nether World를 보면, 풍요의 여신 이쉬타르(Ishtar는 Akkadian 이름으로, Sumerian 이름은 Inanna임)가 돌아올 수 없는 땅(“the land of no return")인 죽은 자들이 거주하는 지하세계(“the Nether World")를 여행함이 묘사되어있습니다.

기원전 200년 전후에 유행하던 묵시문학(Apocalyptic), 외경(Apocrypha), 위경(Pseudepigrapha) 등을 거치면서, 지하에 있다고 믿어져왔던 음부(스올; 하데스: ᾅδης)는 제삼 하늘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참고: 에녹2서 10:1). 그 개념도 죽은 사람들의 세계에서 하나님을 믿지 않다가 죽은 사람들이 거하는 곳으로 한정되어졌습니다(참고: 누가 16:23). 하나님을 잘 믿다가 죽은 사람의 영혼은 낙원(파라다이스; παράδεισος)에 들어가는데 이곳에는 생명나무(“the Tree of Life")와 생명강과 각종 실과가 있는 곳이라고 믿어집니다(에덴동산: 에녹2서 8장; 누가 16:23; 계시록 2:7).

영혼의 상태로 머물러 있는 낙원(פרדס; παράδεισος)과 음부(שׁאול; ᾅδης)는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때 백보좌 심판(“the White Throne Judgment") 후에 영혼과 몸이 함께 거하는 천국(ἡ βασιλεία τών οὐρανών)과 지옥(γέεννα)으로 대체되어집니다(그러나 낙원이 천국의 의미로, 음부가 지옥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함).
천국(天國)과 지옥(地獄)에 관해서는 신약성경에서 주로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천국은 몸으로 부활한 성도들이 최후의 심판 이후 하나님과 함께 거하면서 하나님을 영원히 찬양하고 영광돌리는 삶을 사는 영원한 처소입니다.
지옥이란 말은 예수님의 말씀이외에는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의 서신 3장 6절에서만 그 명칭을 찾을 수 있는데 그 근원은 역대하 28장 3절과 33장 6절에 나옵니다. 곧,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몰렉에게 자녀를 불에 태워 제사를 지내왔고, 후에는 ‘힌놈의 아들 골짜기’가 지저분한 쓰레기를 태우는 장소로 사용된 것에서 지옥(게헨나, γέεννα)은 이와같이 하나님을 잘 믿지 않던 쓰레기와도 같은 인간이 영원히 불타는 장소라는 의미입니다.
구약성경에는 지옥이란 말이 나오지 않는데, 다만 그 개념이 이사야서 66장 24절에 나옵니다(“그들이 나가서 내게 패역한 자들의 시체들을 볼 것이라. 그 벌레가 죽지 아니하며 그 불이 꺼지지 아니하며 모든 혈육에게 가증함이 되리라.”)



참고사항
1. 위경서중에 하나인 에녹2서는 하늘을 열 개의 하늘로 보고, 제 10 하늘에 하나님이 계시고, 제 3 하늘에는 낙원과 ‘무서운 고통의 땅’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에녹2서 8:1-5, 10:1).

2. 낙원(παράδεισος): 1) (Persian origin) 광대한 보호구역, 사냥지, 물이 잘 흐르는 공원, 목초지; 2) (일반적) 정원, 휴식처(동산, 즐거운 장소(느 2:8; 전 2:5). 인류의 조상 아담과 이브가 살던 에덴 동산.

3. 음부(שׁאול; ᾅδης): 1) 플루토 ... 지하세계의 신; 2) 오르쿠스 ... 지하세계, 사자(死者)의 세계, 3) 사후의 중간 상태, 4) 지옥(地獄).

4. 지옥(γέεννα): 1) 바깥 어두운 데(마태 8:12); 2) 풀무 불(마태 13:50); 3) 영원한 불(마태 18:8); 4) 지옥 불(마태 18:9).

 

십일조에 관하여

십일조에 관하여


1. 십일조의 시작:
성경에 등장하는 최초의 십일조는 아브라함이 살렘왕 멜기세댁에게 전리품 중에서 십분지 일을 바친 것입니다.
(창세기 14: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댁에게 주었더라.")
두 번째 등장하는 십일조에 대한 언급은 벧엘에서의 야곱의 서원기도입니다. (창세기 28:20-22..."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2. 십일조의 목적:
1.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심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所有)임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그중 십의 일을 취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들로는 아홉을 갖고 살게 하십니다.
레위기 27:30..."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로마서 11: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2.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열두 지파(레위는 빠지고, 대신에 요셉이 두 지분을 차지함--므낫세와 에브라임)에게 땅의 기업을 허락하시되, 하나님의 전(殿)을 돌보는 레위지파에게는 땅의 기업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이는 그들로 하여금 온전히 이 일에 그들의 힘과 노력을 기울이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대신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열두 지파로 십일조를 바치게 하심으로 레위지파의 경제적 삶을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여 주셨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드리는 제사(번제, 화목제, 소제, 속죄제, 속건제)는 하나님께서 흠향하시기 위한 것이나, 십일조는 하나님이 레위지파의 생활을 위해서 쓰시고자 함입니다.
실제적으로,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는 그들의 십일조를 레위지파를 위해서 떼고, 레위지파는 다시 이 십일조의 십일조를 아론의 후손들을 위해서 바칩니다. 아론의 후손들은 십일조의 최종적인 사용자가 되고 그들은 그들이 받은 십일조를 따로 뗄 필요가 없습니다.
또 매 삼년마다 별도로 소산의 십일조를 (가난한) 레위지파 사람들과 객과 과부와 고아를 위해서 바칩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진 다음에는 레위지파를 위한 십일조 이외에 왕을 위한 십일조(=10% 세금: tax)도 바쳐야 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한 사람의 소득 혹은 소산에 대한 매년 부담은 왕정정치 이전에는 13.3%이었고 왕정정치 이후에는 23.3%가 되었습니다(레위자파를 위한 10%, 왕 또는 국가를 위한 10%, 매 삼년마다 객과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레위 자손들을 위한 10%[=매년 3.3%]).
민수기 18:21..."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다 갚나니." (cf. 민수기 18:24)
민수기 18:28..."너희(=레위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擧祭)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십일조로서의)은 제사장 아론에게 돌리되"
신명기 14:28-29..."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cf. 신명기 26:12-14)
사무엘상 8:15-17..."그(=왕)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세금으로서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너희 양 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3. 신약성경 속의 예수님의 십일조에 대한 입장: 온전하고 허식(虛飾)이 없는 십일조를 권하십니다.
마태 23:2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의와 인과 신)도 행하고 저것(=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비교: 누가복음 11:42)

*성경구절 인용(引用) 

구약 성경
창세기 14: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댁에게 주었더라." (최초의 십일조: 아브라함이 살렘왕 멜기세댁에게 십일조를 받침)
창세기 28:20-22..."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벧엘에서의 야곱의 서원 기도)
레위기 27:30..."땅의 십분의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cf. 레위기 27:31)
레위기 27:32..."소나 양의 십분 일은 막대기 아래로 통과하는 것의 열째마다 여호와의 거룩한 것이 되리니"
민수기 18:21..."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다 갚나니." (cf. 민수기 18:24)
민수기 18:26..."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민수기 18:28..."너희(=레위인)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擧祭)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십일조로서의)은 제사장 아론에게 돌리되"
신명기 12:6..."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우양의 처음 낳은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하나님의 택하신 예배 장소) 가져다가 드리고" (cf. 신명기 12:11)
신명기 14:22..."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cf. 신명기 12:17-19, 14:23-25)
신명기 14:23..."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The Living Bible: "... The purpose of tithing is to teach you always to put God first in your lives."
["십일조의 목적은 너희에게 하나님을 항상 너희의 삶의 첫 번째에 두도록 가르치기 위함이라."])
신명기 14:28-29..."매 삼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cf. 신명기 26:12-14)
사무엘상 8:15-17..."그(=왕)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세금으로서의 십일조)를 취하여 자기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너희 양 떼의 십분 일을 취하리니 너희가 그 종이 될 것이라."
역대하 31:5-6..."왕(=히시기야)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처음 것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유다 여러 성읍에 거한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왔고, 또 그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왔으며" (cf. 역대하 31:12)
느헤미야 10:37-38..."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에 두고 또 우리 물산의 십일조를 레위사람에게 주리라 하였나니 이 레위사람들은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물산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하나가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 곧 곳간에 두되" (cf. 느헤미야 12:44, 13:5, 13:12)
아모스 4:4..."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말라기 3:8-10..."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적질하였으므로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신약성경
마태 23:2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義)와 인(仁)과 신(信)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의와 인과 신)도 행하고 저것(=십일조)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누가 11: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公義)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행하고 저것(=십일조)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누가 18:12..."나(=바리새인)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금식과 십일조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바리새인의 위선이 잘못임)
히브리서 7:2-10..."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멜기세댁)에게 나눠 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고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댁은 아브라함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蔽一言)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 이는 멜기세댁이 아브라함을 만날 때에 레위는 아직 자기 조상의 허리에 있었음이니라."
*로마서 11: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고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고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란 소설을 읽어보았다. 그 소설에는 신학도의 길을 가다가 중도하차한 민요섭이란 삼십대 초반의 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 사람의 피살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노트를 통해, 야훼 하나님보다 더 완전한 신을 찾고자 하는 그의 방황과 갈등이 알려진다. 1979년에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품인데 이 소설을 통하여 이문열은 인간의 논리와 관념 속에서 완전한 신을 찾고자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완벽한 신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약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를 접하면서 갖는 의문은 한결같이 공통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는 전지전능하시다고 하는데 그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것을 모를 수 있었는가? 또한 그가 옛뱀의 미혹에 빠져 타락한 모든 책임을 인간의 자유의지에 돌리는데, 악에게 미혹되어 넘어지는 자유의지라면 그 인간의 의지 가운데는 이미 악의 요소가 들어있거나 하나님의 속성이 불완전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다. 곧,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 책임이 아니라 그렇게 유혹에 쉽게 노출되게 만드신 ‘야훼’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질문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관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땅에서 배고품의 문제와 질병의 문제, 기타 정치, 사회적 문제가 해결됨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요, 이러한 것이 해결되지 않는 내세의 ‘하나님 나라’는 무의미하다고 본다.

좀더 완전한 신을 발견하고 지상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중도하차한 신학도 민요섭에게는 성경 속에서 만나는 불완전한(?) 야훼 하나님과 예수님이 말씀하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보다 더 중요하게 보인다.
좀더 완전한 신의 발견을 위해서는 2세기 영지주의의 여러 갈래 중 하나인 오파이츠(Ophites, Serpent Worshipers: 뱀, 지혜의 계시자)를 따르고 지상의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는 일본의 실천신학자 가가와 도요히꼬의 주장을 따른다.

이문열은 민요섭을 통하여, 민요섭은 그의 노트에 기록된 그의 작품 속의 아하스 페르츠를 통하여 그들의 신에 대한 추구를 다루고 있다. 예수님과 비슷한 시대를 산 가상의 인물 아하스 페르츠는 야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회의를 제기하며 좀더 완전한 신의 발견--창조--을 위하여 먼 방황의 길을 떠난다.
아하스 페르츠는 이집트, 가나안 지방과 페니키아 해변, 히타이트 카르게미쉬 지방, 바벨론, 페르시아를 거쳐서 인도까지 갔다가 로마에 이르지만 그가 찾고자 했던 야훼보다 더 완벽한 신은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는 야훼 속에서 이제껏 너무 일면만을 봄으로써 발견하지 못했던 온전한 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십년의 방황의 세월 끝에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야훼 속에서 새로운 신의 발견과 부름을 위해서 ‘쿠아란타리아’란 광야로 나가 40일의 금식을 단행한다.
금식이 끝난 다음날, 그는 근처의 바위산 기슭에서 그처럼 40일 금식을 하고 있는 예수란 청년을 만나는데,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아하스 페르츠는 이 예수란 청년이 과연 그와 온 이스라엘이 기대해온 메시아인가 시험하기 위해서 복음서에 마귀가 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메시아라는 생각은 현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의 메시아관이기도 하다. 곧, 이 세상에서의 풍요로운 빵과 기적과 지상의 권세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청년 예수는 이의 실현을 거부한다. 그 이후에도 아하스 페르츠는 군중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능력을 보았기에 기적과 권세로서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라고 권고하고 강청하지만 예수는 번번히 거절한다. 결국 아하스 페르츠는 야훼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현되기를 원했던 메시아의 모습을 보지 못하자 철저히 그를 증오하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는 것을 고소해 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 민요섭과 그를 철저히 따르는 조동팔은 아하스 페르츠의 방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아하스 페르츠가 중단한 완전한 신의 발견을 민요섭은 초기작품 뒤 7-8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다시 추구한다. 그들이 한 일이란 성경속의 ‘야훼’ 하나님을 온전한 신의 반쪽으로, 그리고 온전의 또 다른 반쪽 신을 등장시키는 그들의 성경 ‘쿠아란타리아’서를 만드는 것이다. 작가 이문열이 제시한 새로운 이원론적인 양성의 신은 기막힌 독창적인 발견인 것 같지만 기실은 영지주의자들이 2세기 중엽에 이미 제시한 이원론의 신을 소설화한 것일 뿐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로는, 인간의 창조는 불완전한 신인 야훼에 의해서 이뤄지고 야훼는 인간의 맹목적인 복종을 원하여 지혜의 눈을 밝히는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했지만, 지혜의 신 소피아(Sophia)는 그의 대리자 옛 뱀을 보내어 인간이 어리석은 창조자 야훼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참 자유와 지혜를 얻게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참 크리스천의 자유는 불완전한 신 야훼가 만들어놓은 율법의 사슬에서 벗어나 영지(Gnosis)라 표현되는 지혜의 깨달음으로 구속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민요섭이 발견했다고 주장한 완전한 신은 온전을 이루는 두 반쪽의 신, 곧 선의 신 야훼와 지혜의 신의 조화로 이루어진다. 그 신은 “선악의 관념이나 가치판단에 관여하지 않는 신이며, 먼저 있은 존재를 뒤에 온 말씀으로 속박하지 않는 신이며,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시인하는 신이며, 천국이나 지옥으로 땅위의 삶을 간섭하지 않는 신이며, 복종과 경배를 원하지 않고 희생과 강요를 강요하지 않는 신이며, 우리의 지혜와 이성을 신뢰하며 우리를 온전히 자유케 하는 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온전한 신을 발견한 민요섭은 그 신으로 인하여 기쁨이 넘쳐나지 않는다. 인간의 관념과 이상 속에서 창조된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니요 다만 허구(虛構)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민요섭을 살해한 그의 추종자 조동팔의 입을 빌어서 그는 말한다. “우리 인간은 신 안에 남아 있었어야 했다. 불합리 하더라도 구원(救援)과 용서(容恕)는 끝까지 하늘에 맡겨두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불합리하며 왜 모순이 많은 분으로 보일 때가 있을까?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자되시는 분으로서 알고자 하고 믿고자 하지 않고 나의 논리의 작은 상자 속에 담을 수 있는 분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죄(罪)의 기원(起源)

죄(罪)의 기원(起源)



그리스 신화(神話)에 등장하는 불의 신 프로메테우스(Prometheus)는 하늘의 불을 훔쳐 인간들에게 전해 주었다는 이유로 신들의 신 제우스(Zeus)의 노여움을 사서 카프카스(Caucasus) 산의 바위에 묶였다가 결국에는 독수리에게 간과 내장을 파먹혔다고 한다. 그보다 앞서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와 인간들을 벌하기 위하여 판도라(Pandora: 그리스 신화, 인류 최초의 여자)에게 상자를 들려서 인간 세상으로 내려보냈는데 그 상자의 뚜껑을 열었더니 온갖 해악이 나오고 상자 속에는 희망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보는 해악과 절망, 인류 불행의 기원이라 할 것이다. 이 죄악의 기원이나 그리스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신과 인간간의 사랑이 독창적인 것 같지만 기존에 있었던 성경 속의 ‘죄의 기원’을 빌어서 변형시킨 것에 불과하다.

유대인들은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온 경위를 세 가지로 설명한다. 이 세 가지 중 둘은 성경에 나오는 내용이다. 첫째 설명은, 정경(正經)에는 나오지 않고 위경(Pseudepigrapha) 중 하나인 에녹2서에 나온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근원적 태초, 하늘 위의 하늘에도 하나님 이외에 아무 존재가 없을 때와 창세기 1장 1절의 천지창조의 태초 사이에 하나님께서 하늘에 천사들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임무를 맡기셨다. 그들 중 대천사(archangel)라고 하는 직분이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직분으로서 이조시대 임금의 명령을 전하는 도승지에 해당한다.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리기 위해서 성경에 등장하는 미가엘, 가브리엘 등도 이에 속하는 천사들이다. 그 대천사 중 하나인 루시퍼(Lucifer)라고도 하는 사타나일(Satanail)이 하나님의 명령을 전하다보니까 나중에는 자신의 권능이 마치 하나님만큼이나 되는 줄 착각하고 다른 천사들을 부추겨서 하나님께 대적하였다가 패하여 공중으로 내쫓김을 당하게 된다. 긍휼의 하나님께서는 이 사타나일에게도 은혜를 베푸셔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공중의 권세를 그에게 주신다. 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는 창세기 1장 하나님의 여섯 날 동안의 창조 중 둘째 날에만 “보시기에 좋았더라”란 말이 빠진 까닭을 이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이 궁창 하늘--곧 공중의 권세를 사타나일에게 주실 것이기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며 흡족해 하지 않으셨다고 해석한다. 천사의 타락이 인간 타락의 빌미가 되었다.

인간 세상에 죄가 들어오게 된 두 번째 설명이 이어진다.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사단의 다른 형태(agent)인 옛뱀이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게 하는 사건이다. 하와만 먹었을 뿐 아니라 아담도 함께 먹음으로써 둘이 선악을 구분하게 되었고, 그들의 벌거벗음을 보고 부끄러워하였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을 두려워하여 숲속에 숨는다. 선악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일 때는 죄 짓는 일이 적었는데, 인간이 선악(善惡)을 알면서부터는 선을 행하려 하지 않고 선으로부터 먼 악을 더 행하게 된다. 믿는 사람의 삶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 일을 하는 대신에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고 기뻐하시지 않는 일을 더 행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바울은 이를 ‘죄의 법’이라고 했다. 로마서 7장 19-21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罪)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한다.

셋째 설명은 노아의 홍수로부터 백이십 년 전의 사건으로서 창세기 6장에 그 개략이 나오고 위경서 중 에녹1서(1-36장)에 그 내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6장 1-2절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라고 했다. 에녹1서의 설명에 따르면, 세미아즈(Semyaz)와 아자젤(Azazel)이라고 하는 대천사의 지휘 하에 하늘나라 200명의 파수 천사들이 하늘로부터 지상을 굽어 내려다보니 사람의 딸들인 여자들이 아름다우매, 그들과 결혼하고 그들에게 화장하는 법을, 또 세상의 남자들에게는 전쟁하는 법을 가르침으로써 악이 세상에 들어왔다고 설명한다. 창세기 6장 3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肉體)가 됨이라.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패역한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해서 믿음의 사람 노아에게 백 년에 걸쳐서 방주를 만들게 하셨다. 백 년의 시간을 주신 것은 노아의 순종을 보시기 위함이기도 하였지만, 그간에 혹시 ‘인간들이 그들의 패역에서 돌이킬까’ 기대하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함을 아시기에 창세기 6장 5-6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라고 했다.

죄가 인간 세상에 들어와 번진 것은 마치 잉크 한 방울이 맑은 물이 담긴 병에 떨어진 것과 같다. 검은 잉크 한 방울은 처음 떨어진 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곧 물병 전체에 번져서 물병의 물을 다 검게 만들어 버린다. 물병을 흔들 때 그 번지는 속도는 더욱 빨라서 삽시간에 물이 검게 변한다.


한자어가 증거하는 창세기의 사건들

한자어가 증거하는 창세기의 사건들


노아의 홍수와 얼마 후에 있었던 바벨탑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5,000-4,500년 전(주전 3,000-2,500년)에 일어난 창세기의 큰 두 사건이다. 바벨탑 사건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사방으로 흩으셨는데, 중국인의 조상들도 이때 흩어져 황하강 쪽으로 오게 되었다. 이들이 한자어를 만들게 된 것이 그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때라고 한다. 상형문자인 한자어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 지금으로부터 4,500년 전(주전 2,500년), 즉 바벨탑 사건 이후이다. 그들이 문자를 만들 때 생각한 것은 선조로부터 전해들은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한자어에서 창세기 사건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C. H. Kang 이라는 중국인 목사님과 Ethel R. Nelson이라고 하는 방콕 선교사 출신의 미국인이 지은 「창세기의 발견 (The Discovery of Genesis) 」(1979)라는 책에 의하면 한자어의 형성이 창세기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 예로, 중국인 선조가 생각한 ‘복(福)’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혹은 첫 번째 사람)을 밭(정원, 동산)에 둔 사건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를 창세기 2장 8절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라고 기록했다. 또 육체를 뜻하는 ‘육(肉)’은 한 사람의 속(내)에 또 한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처음 만드시고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그 속에서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자기의 아내를 내자(內子)--안사람 또는 속사람이라고 불렀고, 한자의 영향을 받은 우리도 아내를 안사람이라고 부른다. 여자가 집안에 있어서 안사람이 아니라 남자 안의 것으로 만들어져서 안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육(肉)’의 바깥이 남자를, ‘육(肉)’의 안에 있는 사람(人)이 여자를 뜻한다면 이 둘이 합쳐질 때 육체를 뜻하는 ‘육(肉)’ 자가 된다. 창세기 2장 24절은 이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했다. 영어성경은 “they shall be one flesh."라고 표현했다.

홍수의 경우 ‘홍(洪)’과 큰 배를 뜻하는 ‘선(船)’은 노아 가족의 수 ‘8’과 관계가 있다. ‘홍(洪)’은 물이 지상에 범람했을 때 8명(노아와 그 아들 함, 셈, 야벳과 그들의 아내)이 손을 잡고 협력하여 구원받았음을 기억하고 만든 글자이며, 큰 배 ‘선(船)’은 보통 배를 뜻하는 주(舟)에 8명의 사람이 탄 것이므로 노아의 방주를 생각하며 만들었을 것이다.

‘탑(塔)’은 바벨탑 사건에 관한 기록을 연상시킨다. 바벨탑을 쌓되 흙과 풀을 재료로 쌓았고 이 사건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었다. 이때, 창세기 11장 1절의 기록대로, “구음(口音)이 하나이요 언어(言語)가 하나”이었다.

‘의(義)’자를 보면 ‘양(羊)’ 밑에 나를 뜻하는 ‘아(我)’가 있다. 곧,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밑에 나를 놓을 때 의로워질 수 있다는 해설이 가능한데, 4,500년 전 사람이 이것을 생각했을 리는 없고, 이를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아(我)자가 손(手)과 창(戈)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곧, 손에 든 창으로 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드림으로 의로워진다는 의미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노아 홍수 이전(antediluvian)의 기록으로는 아벨의 제사가 있다. 창세기 4장 4절에 보면 아벨은 양(羊)의 첫 새끼로 제물을 삼아 하나님께 드렸다. 농산물을 제물로 드린 가인이나 양의 새끼를 드린 아벨이나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까닭은 부모 아담과 하와의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그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불의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림으로써 죄와 허물을 씻음 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시고 가인의 제사를 열납하지 않으신 이유에 대해 우리가 흔히 아는 바로는 아벨은 첫 수확물인 양을 정성껏 드렸기 때문이고, 가인은 첫 수확물을 드리긴 드렸지만 구분함이 없이 아무렇게나 드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성경학자들은 이를 달리 해석한다. 하나님께서 후에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것같이 이들에게도 죄와 허물을 용서받기 위해서 양(혹은 다른 짐승)으로 제물을 삼아 드리라고 명하셨을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가인은 그 명령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제사를 물리치신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일리 있는 주장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시대 제사의 모형을 따라서 어린양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제사를 드림으로써 인간을 의롭게 하셨다. 아벨의 제사,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명령을 좇는 이스라엘의 양을 제물로 삼는 제사는 어린양 제사의 모형이요 예표가 된 것같이, 한자 ‘의(義)’는 원래 손에 창을 들고 양을 죽여서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 의로워짐을 뜻하지만, 이 글자는 우리 각 사람이 우리를 위한 희생제물이 되신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앞에 꿇어 엎드릴 때 의로워지게 됨에 대한 예표요 모형이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