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February 27, 2012

"장기목회와 제반 회의 운영"

"장기목회와 제반 회의 운영"


목회자를 힘들게 하는 것은, 자기의 신앙적인 상태가 고조되어 있을 때나 바닥으로 처져 있을 때나,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설교해야 한다는 점이요, 수많은 회의를 인도해야 한다는 점이다. 목회 중에 회의가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크다. 어느 때는 설교만 마치고 돌아가서 푹 쉬고 싶은데, 제직회나 당회, 또는 무슨 위원회 모 임 등 숱한 회의를 인도하다 보면 주일날 저녁때쯤은 아무 일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지쳐버리는 경우가 많다.
어느 주일날은 은혜로운 설교를 통해서 온 교회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으나 제직회 도중에 발생한 의견다툼으로 인해서 교회 분위기가 살벌 해지기도 한다. 사실, 어느 목회자는 설교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으나, 너무 서툰 회의로 인해서 자주 실수를 범함으로 결국 교회 를 떠남으로 자신이나 교회나 깊은 상처를 남기는 경우를 본다.
반대로 어느 목회자는 설교는 시원치 못하나, 회의와 교회 운영에는 능숙함으로 장기 목회를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회의 진행을 잘하는 것도 장기 목회에서는 아주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면 회의를 어떻게 진행하여야 하는가?


1. 결정을 서둘지 않는 것이다.
목회 초년 시절에는, 목회 대선배들이 무슨 회의 중에 반대를 만나면 “이 문제는 다음 당회 때 재론하기로 하지요.” 혹은 “한 달 동안 기도해 보고 의논합시다”라면서 한발 물러서는 태도에 대해 ’구렁이 담 넘어가듯 하는 그러한 모습은 지도자로서는 너무나 우유부단한 것이다‘고 비판하고는 했다. 그러나 목회 연륜이 깊어갈수록 필자도 그런 모습을 닮는 것을 발견한다. 왜 그런 모습을 닮게 되는가? 목회 현장에서 보면 서둘러 결정한 사안이 적지 않은 냉담이나 반대를 만나서 오랜 시간이 걸려 실행되는 경우를 보게 되는 반면, 한 달 늦추면서 얻어낸 합의가 온 교회의 협력을 통해서 의외로 빠른 시간에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2. 다른 분의 의견을 존중하는 것이다.
40대 초반 때였다. 한번은 제직회를 인도하는 중에 어느 분이 너무나 터무니없는 의견을 제안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언지하에 “그것은 신학적으로 틀린 것입니다”라고 공박하고 묵살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제안했던 그 분이 그 뒤부터는 필자의 사역에 아주 비협조적으로 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후에 안 것이지만, 모처럼 의견 을 냈던 그 분은 필자의 공박을 ‘당신은 제발 무식한 소리를 하지 말라’는 뜻으로 오해함으로 너무나 속이 상해서 좀체 마음 을 풀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 때에 필자는 크게 깨닫고 ‘이제부터는 누구의 의견이든지 존중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래 서 당회나 제직회 석상에서 형편없는 제안을 내 놓는 분이 있을지라도, 좋은 방안을 보충하여 그 의견이 성안이 되도록 힘썼고, 때로 나쁜 의도가 깔린 의견을 내놓더라도 부드러운 표정으로 그 의견을 좋게 설명하면서 제안하고는 했다. 그러면 어느 때는 그 의견이 다른 분들에 의해 부결되는 경우가 있지만, 자기의 의견을 끝까지 존중해 준 필자에 대해서는 협조적으로 나가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3. 충분한 자료준비와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제반 회의 중 목회자가 안건을 내놓는 경우가 많 다. 그 때에 중요한 것은 제안에 대한 충분한 자료를 준비하고 납득할 수 있도록 합리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점도 회원들을 존중하는 자세가 되는 것이다. 그 안건에 대한 많은 자료준비와 열심히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안에 대한 목회자의 깊은 관심을 당회원이나 제직들, 혹은 위원들이 느끼게 됨으로 쉽게 반대하거나 묵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성의한 자료 준비와 충분치 못한 설명은 결국 무성의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 분명하다.
 

"성경적 부부의 회복"

"성경적 부부의 회복"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신적인 기관이 있다면 그것은 가정과 교회이다.
교회는 신약시대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성령을 이 땅에 보내 주심으로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었지만 가정은 구약시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에덴동산에서 인간에게 최초로 허락하신 것이다.

교회는 가정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정도로 가정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근본적 모체가 되는 축복의 장이다. 그런데 이렇게 소중한 우리의 가정들이 갖가지 이유들 때문에 깨어져 가고 있는 슬픈 현실이 때로는 가계에 흐르는 죄의 유전 때문일 수도 있고(출20:5), 자라난 환경 속에서 받은 상처 때문일 수도 있고,  실망되고 불만스러운 결혼 생활 때문일 수도 있고,  요즘처럼  물질적인 어려움을 맞아 경제적인 요인 때문에 불화를 겪는 경우도 있고, 자녀들의 문제나 시가나 처가 등 주위 친척들과의 갈등 때문일 수도 있고, 갖가지 주위의 시험과 유혹 때문에 가정이 불행에 빠지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래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유지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어느 작가는 결혼 생활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20대에는 행복의 꿈에 부풀어서 신이 나서 살고
30대에는 서로에 대해 실망을 느끼며 환멸을 참으며 살고
40대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지못해 체념하며 살고
50대에는 서로 없어서는 안 되니까 의지하는 마음으로 살고
60대에는 서로 안 됐다 생각되어 가엾어서 살고
70대에는 지금까지 참고 살아준 것만 해도 고마워서 산다.

과연 우리의 부부 생활은 어떠한가?
지금까지 우리는 불행했던 부부의 행복을 회복하기 위해 정신(심리) 치료나 가족 치료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가정의 문제 해결을 위해 갖가지 노력을 다 기울여 왔다.
물론 이러한 치유의 과정이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찬 가정의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성경적 부부 관계의 회복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경적 부부 관계의 회복이 없이는 마치 모래 위에 지은 집과 같기 때문이다(마7:24-27).

그러면 성경에서 말하는 부부 관계는 어떠한 것인가?
성경에서 부부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말씀하시는 곳은 에베소서 5장, 골로새서 3장, 베드로전서 3장이다. 그런데 이 말씀들을 찾아보면 같은 말씀을 계속적으로 반복하여 권면하신다.

I. 남편에게 순종하는 삶(엡5:22, 골3:18. 벧전3:1)
주님께서는 아내들에게 권면하실 때 다른 무엇보다도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명령하신다.
그것은 아내들의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하고 또한 아내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비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편 내조 잘 해라, 자녀를 잘 기르라, 시부모님 잘 모셔라, 집안 살림 잘 해라, 몸 단장 잘 하라는 말씀보다도 이 말씀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런데도 왜 아내들은 남편에게 복종이 안 되는가?

첫째, 많은 아내들이 남편이 이해되지 않거나 존경스럽지 못해서 순종이 안된다고 말한다.
둘째, 유교의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너무 굴욕적인 맹종을 강요받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복종이란 단어 자체에 거부감부터 느낀다.
셋째, 심리학자 융(Carl Jung)에 의하면 여자의 무의식 속에 있는 애니무스(Animus)라는 남성성 때문이다.
넷째, 심리적으로 볼 때 여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자존심이 순종을 가로막는 요인이 된다.
다섯째, 궁극적으로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 남편에게 복종이 안 되는 것이다(엡5:21).

그러나 성경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5:22)고 권면한다.
여기서 ‘복종하라’(휘포타세스테)란 단어는 남편을 사랑함으로써 기쁨으로 섬기는 의미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령 충만한 성숙한 아내는 주님께 복종하듯이 남편에게도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벧전3:5-6).

그러면 남편에게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
(1) 온유하고 안정된 마음(벧전3:3-4)
(2) 따스한 사랑의 말(약3:2-12)
(3) 몸으로 섬김(요13:15, 17)
(4) 만족스런 성생활(고전7:3-5)
(5) 말씀의 은혜 나눔(골3:16-17)
(6) 남편을 위한 기도와 돌봄(고전7:14)

아내의 남편을 향한 이러한 헌신적 사랑의 섬김은 어떠한 남편이라도 기필코 변화시키고 가정을 행복으로 이끄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II. 아내를 사랑하는 삶(엡5:25, 골3:19, 벧전3:7)
남편들의 경우는 여러 가지 사회생활을 통해 복종에 익숙해져 있으나 사랑이 안 되는 것이 가장 큰 약점이기 때문에 사랑을 베풀 것을 명령하신다.
남편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은 아내를 사랑하고 가족을 돌보는 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편에게 건강관리 잘하라, 밖의 활동 잘하라, 밖의 사람들에게 잘하라는 말씀보다도 가정에서 아내를 먼저 사랑하고 가정에 충실할 것을 권면한다(딤전3:5, 12).
그런데 왜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가?

첫째, 많은 남편들이 아내가 사랑스런 행동을 하지 않아서 사랑이 안 된다고 말한다.
둘째, 유교의 문화 속에서 너무 어머니의 사랑을 받다 보니까 사랑을 베풀기보다는 오히려 사랑받고 인정받길 원하는 의존성이 강하다.
셋째, 심리학자 융(Carl Jung)에 의하며 남자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 자리잡은 원형(Archetype)이 ‘위대한 왕’이기 때문에 군림하려고만 한다.
넷째, 심리적으로 볼 때 남자의 마음속에 뿌리내린 이기심이 사랑을 가로막는 원인이 된다.
다섯째, 궁극적으로 남편들이 성령 충만하지 못할 때 아내를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엡5:25)고 말씀한다.

여기서 ‘사랑하라’(아가파테)란 단어는 아내에 대해서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베풀라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주님께서 죄인 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셨듯이(롬5:8)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내에게 어떻게 사랑을 베풀 것인가?
(1) 지금까지의 고생에 대한 감사(살전5:18)
(2) 세심한 관심과 마음의 배려(벧전3:7)
(3) 사랑이 담긴 카드나 선물(잠 18:16)
(4) 아내나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딤전5:8):  Meeting, Family Time
(5) 영적으로 아내를 격려하고 인도함(딤전3:5,): 부부 기도회, 가정 예배
(6) 아내를 위한 기도와 돌봄(고전7:14)

남편의 아내를 향한 뜨거운 사랑의 감동은 어떠한 아내라도 언젠가는 변화시키고 온 가정이 주님 앞에 굳게 서는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다.

III. 부부 회복의 길
우리 부부의 보다 심각한 문제는 성경에 증거된 이 복종과 사랑의 말씀을 내가 먼저 실천하려고 하지 않고 상대방에게만 요구하는 데 있다.
그래서 흔히 예수 믿는 가정에 이런 부부 싸움이 일어난다.
남편이 큰소리를 치면서 “원 세상에 당신처럼 신경질적이고 재미없는 여자가 어디 있어? 나나 되니까 참고 사는 거지”하며 공격한다.
그러면 아내도 지지 않고 소리치길 “흥, 당신같이 자기주장만 옳다는 멋없는 남자도 세상에 드물걸요? 내가 어쩔 수 없으니까 죽어지내지” 한다.
그러자 남편이 성경을 인용하면서 소리치기를 “성경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했는데 당신은 도대체 교회에 가서 뭘 배웠어?”
그 때 아내도 한다는 말이 “아니, 그러면 당신 성경책은 그 다음은 찢어졌어요? 그 다음에 남편은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과 같이 하라고 했잖아요?”소리친다.
이처럼 부부간에 복종과 사랑의 싸움은 일생토록 끝이 없는 불행의 연속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기억할 것은 성경 어느 곳에도 남편이 아내에게 복종을 강요하라거나 아내가 남편에게 사랑을 요구하라고 가르친 곳이 없다는 것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주께 복종하듯 복종하면 되고, 남편은 아내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듯 사랑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할 때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왜 하 나님께서 저런 사람을 나에게 허락하셨는가?”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기보다는 “그래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저 사람을 인도해 주셨구 나!”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하나님께서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 상대방을 들어 사용하신 사실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게 될 것이 다.

그리고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 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전7:14) 하신 말씀의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 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변화가 상대방을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자녀들까지도 변화시키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는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가 엎드려야 할 때이다. 말씀에 비추어 남편으로서, 아내로서의 삶을 돌이켜야 할 때이다. 내가 먼저 변화 되는 삶을 통해 상대방도 변화된다. 그리하여 성경적 부부 관계의 회복을 통해 행복한 가정을 분명히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9)

* 어느 부부의 사랑 이야기 * 
나이 스물여덟, 남자는 어느 사랑하는 여자의 남편이 되었지요.
나이 스물여섯, 여자는 그 남자의 아내가 되었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축복 속에 성당에서 조촐한 출발을 하였답니다.
그리고 어느새 2년이란 세월이 흘렸지요....

그 때.. 그들에게 불행이 닥쳤답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너무나 큰 불행이었어요.
그들이 살던 자그마한 집에 그만 불이 났답니다.
그 불로 아내는 실명을 하고 말았데요.
모든 것을 잃어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겐 어쩌면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 버린 셈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네요.

두 사람이 만들어갈 그 수많은 추억들을 이제는 더 이상 아내가 볼 수 없을테니 말입니다.
그 후로 남편은 늘 아내의 곁에 있었죠.
아내는 앞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혼자 몸을 움직이는 것도 쉽지가 않았답니다.
남편은 곁에서 아내를 도와 주었지요.
처음엔 아내가 많이 짜증도 부리고 화도 내었지만 남편은 묵묵히 그 모든 것을 받아 주었답니다.
늘 그것이 미안했었나 봐요.
당신을 그 불 속에서 구해 내지 못한 것이...
그리고 그 아름다운 눈을 잃게 만든 것이 말이에요...
또 다시 시간이 흘러 아내는 남편의 도움없이도 주위를 돌아 다닐 수 있을만큼 적응을 하였지요.

그리고 이제서야 남편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죠.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쳐서..
하나 남은 세상의 목발이 되어 주고 있음을 알게 된거죠.
이젠 다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지 않았답니다.
그렇게 이젠 둘은 아무 말 없이 저녁 노을에 한 풍경이 되어도 편안한 나이가 되어 갔답니다.
시간은 그들에게 하나 둘씩 주름을 남겨 놓았지요.

아름답던 아내의 얼굴에도 세월의 나이테처럼 작은 무늬들이 생겨 나고 남편의 늘 따사롭던 손도 여전히 벨벳처럼 부드럽긴 하지만 많은 주름이 생겨 났지요.
남편은 이제 아내의 머리에 난 하얀 머리카락을 보며 놀리곤 했답니다..

"이제 겨우 8월인데 당신의 머리엔 하얀 눈이 내렸군..."
어느 날인가 아내가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답니다.

"이제 웬지 마지막으로 이 세상을 한번 보고 싶어요.
벌써 세상의 빛을 잃은지 수십년이 되었지만 마지막으로 당신의 얼굴이 보고 싶군요.
난 아직도 기억한답니다. 당신의 그 맑은 미소를...
그게 내가 본 당신의 마지막 모습이니까요..."

남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답니다.
아내가 세상을 볼 수 있는 마지막 길은 누군가의 눈을 이식 받는 것뿐이었답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지가 않았죠.
아무도 이제 살아갈 날이 얼마 남지 않는 아내에게 각막을 이식해 주려고 하지 않았거든요.
아내는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소원이었지만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남편은 마음 속으로 많은 생각을 했었나 봅니다.

'나 당신의 모습을 한번만이라도 더 보고 싶군요...'
세월은 이제 그들에게 그만 돌아 오라고 말을 전했답니다.
그 메세지를 받은 사람은 먼저 남편이었지요.
아내는 많이 슬퍼했답니다.

자신이 세상의 빛을 잃었을 때 보다 더 많이 말이에요.
그러나 남편은 아내에게 마지막으로 선물을 하나 하고 떠나기로 했지요.
자신의 각막을 아내에게 남겨 주는 것이랍니다.
비록 자신의 눈도 이제는 너무나 희미하게만 보이지만 아내에게 세상의 모습이라도 마지막으로 보여 주고 싶었던 거지요.

남편은 먼저 하늘로 돌아 가고 아내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남편의 각막을 이식 받게 되었죠.
그녀가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답니다.
늘 곁에 있던 남편의 그림자조차 말이죠.
병원 침대에서 내려와 이제 환하게 밝혀진 거리의 모습을 내려다 보며, 자신의 머리뿐만이 아니라 사람들 머리에 가득 내려 앉은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정경을 내려다 보며, 아내는 남편의 마지막 편지 한통을 받게 되었답니다.

당신에게 지금보다 훨씬 전에 이 세상의 모습을 찾아 줄 수도 있었는데....
아직 우리가 세월의 급류를 타기 전에 당신에게 각막 이식을 할 기회가 있었지.
하지만 난 많이 겁이 났다오.
늘 당신은 내게 말하고있었지.
나의 마지막 모습에 대해서...
아직 젊을 때 나의 환한 미소에 대해서 말이오. 하지만 그걸 아오? 우리는 너무나 늙어 버렸다는 것을...
또한 난 당신에게 더 이상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없다오.
당신은 눈을 잃었지만 그 때 난 나의 얼굴을 잃었다오.
이제는 미소조차 지을 수 없게 화상으로 흉칙하게 변해 버린 나의 모습을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았소.
또한 우리 생활의 어려움과 세상의 모진 풍파도 말이오.

난 당신이 나의 그 지난 시절 내 미소를 기억하고 있기를 바랬소.
지금의 나의 흉한 모습 보다는...
그러나 이제 나는 떠나오.
비록 당신에게 나의 미소는 보여 주지 못하지만 늘 그 기억을 가지고 살아 가기 바라오.
그리고 내 마지막 선물로 당신이 이제는 환하게 변해 버린 세상을 마지막으로 보기를 바라오.

아내는 정말로 하얗게 변해 버린 세상을 바라 보며 중얼거렸답니다.
나 알아요.
당신의 얼굴이 화상에 흉칙하게 변해 버렸다는 것을...
그리고 그 화상으로 인해서 예전에 나에게 보여 주던 그 미소를 지어 줄 수 없다는 것도...
곁에서 잠을 자는 당신의 얼굴을 더듬어 보고 알았지요.
하지만 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당신도 내가 당신의 그 미소를 간직하기 바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미안해 할 필요 없어요.
난 당신의 마음 이해하니까 말이에요..
참 좋군요. 당신의 눈으로 보는 이 세상이...

그리고 며칠 뒤 아내도 남편의 그 환하던 미소를 쫓아 하늘로 되돌아 갔답니다.... 
 

Saturday, February 11, 2012

"한국 경제위기를 계기로 본 성경의 경제원리"

"한국 경제위기를 계기로 본 성경의 경제원리"

   

1. 성경에 나타난 ‘경제(오이코노미아: οἰκονομία)’의 의미

    한국에 경제위기가 닥치자, 많은 사람들이 ‘경제학이 무엇인가?’ 하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경제원론 교과서에 보면 ‘경제학은 인간의 경제행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 정의하기도 한다. 자원의 희소성(scarcity)을 전제하고 있는 경제학은 ‘사람의 필요와 소용에 따라, 희소한 자원을 최적으로(optimal) 이용하기 위하여, 행하는 선택(choice)과 행동(action)에 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소비자(consumer)의 소비경제행위와 생산자(producer)의 생산경제행위, 소비자와 생산자가 만나는 시장에서의 시장경제행위를 다루는 분야를 미시경제학(microeconomics) 이라 하고, 국가차원에서 재정정책(fiscal policy)과 금융정책(monetary policy)을 적절히 운용하여 물가와 임금, 고용, 이자율 등의 조정을 다루는 분야를 거시경제학(macroeconomics)이라고 부른다. 요즘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갖는 국제무역(international trade)도 이 거시경제학에 포함된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경제행위는 미시경제학이나 거시경제학에서와 같이 재화(財貨)와 직접·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행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광의(廣義)의 경제행위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고 하는 단어에서 보는 대로 한 나라를 움직이고 백성을 다스리고 구제(救濟)하는 전반적인 통치·행정행위를 의미한다. 공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도 말하자면 경제행위의 전반이라 할 수 있다. 수신(修身)은 개인의 경제원리(individual economic principle)요, 제가(齊家)는 가정의 경제원리(domestic economic principle)요, 치국(治國)은 국가의 경제원리(nation's economic principle)요, 평천하(平天下)는 세계의 경제원리(global economic principle)를 제시하여주는 것이다.

    경제(economy)란 말은 헬라어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에서 유래되었다. 성경에서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의 일차적인 의미는 ‘가계 혹은 가사의 경영,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한 경영, 관리 및 감독, 혹은 경영자, 감독자, 청지기(οἰκονόμος)의 직무’를 의미한다. 누가복음 16:2-4에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의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고 했는데 여기서 청지기의 사무(16:4), 청지기의 직분(16:3, 4)이 경제(經濟)란 말에 해당한다. 경제를 맡은 청지기(οἰκονόμος)는 현대적 표현으로 하면 (전문(專門)) 경제인(經濟人) 혹은 경영인(經營人)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경제(οἰκονομία)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증거의 사명 혹은 복음증거를 위한 청지기, 관리자(管理者)의 직분(職分)’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9:17에서 바울은 “내가 내 임의로 이것(=복음을 전함)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職分)을 맡았노라”고 했는데, 여기서 직분은 성경적 경제인(=복음증거자)의 사명을 뜻한다.
    셋째로, 성경에서 경제(οἰκονομία)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비된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경륜’이란 뜻을 포함한다. 곧, 하나님의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 할 것이다. 에베소서 1:9에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plan, RSV)을 위하여” (Greek 성경은 1:10...εἰς οἰκονομίαν τού πληρώματος); 3:2에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stewardship, RSV)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9에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plan, RSV)이 어떠한 것을”에서 경륜(經綸)은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의 번역인데, ‘하나님의 경제’ 혹은 영어성경이 plan으로 번역했듯이 ‘하나님의 경제 (혹은 경세제민) 계획’을 뜻한다. 골로새서 1:25에서 “하나님의 경륜(office, RSV)을 따라”고 함과 디모데전서 1:4에서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training, RSV)을 이룸보다”라고 함도 하나님의 인간구원(人間救援)이란 경세제민 (혹은 경제) 계획 또는 정책을 뜻한다.

2. 성경의 경제원리: 평균화 경제원리에 따른 공생주의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인간(소비자 혹은 생산자)의 경제원리는 극대화(maximization) 혹은 최적화(optimization)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은 효용(效用) 혹은 만족(滿足)을 극대화하는 삶을 살아간다. 현대인에게 만족의 척도는 흔히 돈의 많고 적음이다. 직장을 선택할 때도 돈을 많이 준다고 하면 다른 조건들은 대충 받아들인다. 또, 기업은 이윤극대화를 위한 경영을 한다. 더 큰 이윤을 얻기 위하여 때로는 경쟁사의 상품을 비방하고, 또 부정한 방법으로 판매이익을 늘이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제원리는 극대화(極大化)가 아닌 평균화(平均化=balanced out 혹은 averaged out)이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 주시고 그들에게 이를 거두라고 명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이 들판에서 만나를 거둘 때 어떤 이는 많이 거두고 또 어떤 이는 적게 거두었으나, 출애굽기 16:18에 보면,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고린도 교인들에게 모금하라고 할 때, 그는 하나님의 이 ‘평균(平均)의 경제원리’을 설명한다. 고린도후서 8:12-14에서,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함을 보충함은 저희의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J. Calvin)도 평균의 경제원리에 대해서 말할 때, “부한 자는 그들의 물질적 부를 가난한 자와 나누어 갖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가난한 자는 영적 부를 부자와 나누어 갖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다. 따라서 부자는 가난한 자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나누어주는 일군(διάκονος: minister 혹은 servant)이요, 가난한 자는 영의 풍요로움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종(대리자=vicar)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될 때, 그 사회는 물질적, 영적인 부가 평균화되고 모두가 형편이 더 좋아지는(better off) 사회가 될 수 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공유생활(common life: Commonism=공생주의)을 하였다. 사도행전 2:44이하에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라는 한 몸의 지체로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생활을 한 것이다. 초대교회의 공생주의(Commonism)는 평균화 경제원리에 따른 생활이다. 자본주의(Capitalism)는 각자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벌어서 자기가 번 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소비하는데, 한 가지 단점은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커진다는 것이다. 공산주의(Communism)는 각자의 능력에 상관없이 똑같이 벌어 똑같이 사용하자는 것인데, 이상적인 것 같지만 능력이 많은 사람의 일할 의욕을 저하시켜 생산성(productivity)을 떨어뜨리고 따라서 사회 전체가 빈곤(貧困)하게 된다.                                            

그러나, 평균화의 경제원리가 실현되는 사회는 개인의 능력이나 성취욕을 제한하거나 무시하는 공산주의와는 근본이 다르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하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취약점을 보완하게 한다. 평균화 경제원리의 실행은 정부나 기타 권력기관의 강제적 혹은 물리적인 법집행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린도후서 8:1-5: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 공생주의(Commonism)는 자기 능력껏 일하여 일한 만큼 벌어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 나누고 통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평균화 경제원리에 따른 삶이라 할 것이다.

3. 한국의 경제위기: 무엇이 문제인가?

    1997년 11월이후 한국이 맞고있는 이 경제위기는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暴風)같지만 사실은 그동안 쌓여온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현실로 나타난 것이라고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한국을 방문(訪問)할 때마다 느낀 의문은 ‘어떻게 한국 내에 있는 사람들의 씀씀이가 이렇게 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100불은 모처럼 마음먹지 않으면 쓸 수 없는 큰 돈인데,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서너명의 점심 한끼 값으로 10만원쯤은 큰 부담 없이 지불함을 보았다. 필자가 한국을 떠난 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아직 ‘마이카(my car)’ 시대가 아니라 고속도로 휴게소에 그렇게 개인 차량들이 많지 않았는데 10년뒤에 본 한국 고속도로와 휴게소에는 개인 차량으로 초만원을 이루고있음에 한편으로는 ‘한국경제가 이만큼 부강(富强)해졌고 국민들의 삶에 여유가 생겼구나!’ 하는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이 들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현재 한국민의 삶이 미국인이나 일본인의 삶보다도 나아졌단 말인가?’ 하는 질문이 가시지 않았다. ‘세계 최강의 경제국이라고 하는 미국인들도 전반적으로 이런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경제강국으로 급성장한 일본인들 개인의 삶은 높은 물가고로 상당히 쪼들린다고 하는데, 선진국을 향하여 발돋음하고자 하나 아직은 경제강국이 아닌 한국의 국민들만이 유독 이와같은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였다.

    어학연수라는 명목으로 상당수의 한국학생들이 유행따라 (덤으로) 유학 옴을 보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을 눈여겨보면서 과연 이러한 언어연수가 필요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내의 웬만한 영어학원에 다니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영어를 배울 수 있을 터인데, 과반수이상이 한국인들로 구성된 어학연수반의 극히 기초적인 영어수업이 생활비와 기타비용을 포함하여 년 2만불 상당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소수의 착실한 학생들도 있지만, 많은 학생들이 몰려 다니며 여행이나 즐기고 또 다른 여흥꺼리를 찾는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듦이 사실이다. 교회를 나오는 언어연수 학생들(이들은 그나마 착실한 학생들이다)에게 가끔 묻는다. 그들도 여기에서 배우는 것이 별로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연수가 마치 무슨 자격증과도 같이 회사에 취직하는데 도움이 되기때문에 온다고 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다. 이 얼마나 낭비적(浪費的)인 사회유행인가? 더욱 더 문제꺼리로 생각된 것은 S, H, D 그룹등 대기업 직원들의 언어연수이다. 이들에게는 일인당 일년에 4-5만불의 어학연수 비용이 지불된다고 하는데 어학연수를 하러 왔다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때로는 분(憤)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영어의 수준이 기초적인 것이라 아예 어떤 사람들은 수업도 적당히 걸르면서, 끼리 끼리 한국에서 못다한 골프나 치러 다니고, 물건사기와 여행으로 시간을 소모했다. 이것이 YS정부의 세계화 시책에 발맞춘 언어연수의 현주소(現住所)였다. 그러나, 의식화(意識化)가 선행(先行)되지 않은 세계화(世界化)는 꼴불견만 초래할 것이다.

    지난 해 8월에 선배 목사님의 경비까지 대주는 초청으로 선교대회 참석차 영국을 5일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영국까지 왔다가 파리(Paris)를 못보고 돌아가면 후회할 것 같아 큰 마음 먹고 자비(自費)를 들여 하루를 파리에서 머물기로 작정하고 새벽 6시 반에 떠나는 파리행 유로스타(Eurostar)를 타고 도버해협을 물밑으로 지나 세시간 만에 빠리에 도착해서 싸구려 호텔에 짐을 풀고 파리거리를 온종일 걸어다녔다. 놀라운 것은 만나는 동양사람의 80% 이상이 한국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년 남녀들에서 시작하여 30-50대 부인네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길을 걸을 때 들려오는 한국말이 반갑게 여겨지지 않은 나의 심사(心思)가 어찜인지 모를 일이었다. 관광그룹을 만나면 그들은 거의 틀림없이 한국사람들이었다. 60-70년대 일본 관광객들이 유럽을 휩쓸고 다녔다는데, 한국인이 일본인의 전철(前轍)을 밟고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날 영국으로 돌아오는 오후 1시 유로스타(Eurostar)에 30-40명씩 되는 동양인 관광그룹 두 팀이 승차했는데 두 팀 모두 한국인들이었다. 그들의 대화가 귀에 들려온다. “나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프랑스등 현재까지 아홉 개국을 구경했는데, 이번이 두 번째 유럽여행이라서 그런지 어색하지 않다. 다음에는 어디 어디를 가야겠다” 하면서 서로 자기의 여행 편력(遍歷)을 자랑하고 돈에는 전혀 구애(拘碍)됨이 없는 듯 보였다. 그들의 대화를 귓전으로 들으면서, 한국인 여행 안내원이 혹시 급행료라도 지급했나 아니면 단체 손님을 우대하는 규정이 있는지 두 그룹 모두 먼저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보다 앞서서 승차구를 빠져나감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나의 동포란 것이 자랑스럽지 않고 내가 이곳에 이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까지 여겨졌다. 나의 마음 한구석에 우려(憂慮)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한국이 이렇게 가다가는 정말 망하지?!”

    대기업과 은행들이 미국, 일본, 서방 경제선진국들로부터 상업차관(商業借款)을 도입(導入)해와서는 신규투자를 하는데 사용하는 대신에 동남아시아 국가등에 돈놀이를 해온 것도 문제이다. 인도네시아에 60억불의 채권이 있고 기타 다른 동남아국들에도 일정액의 채권이 있음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하게 된다.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 돈을 빌려준 것이 잘못이 아니라, 돈놀이해서 돈을 벌려고 한 그 의식구조가 문제이다. 한국의 외환위기는 실은 동남아의 외환위기만 아니면 안 당해도 됐을 것인데 동남아의 위기로 인해서 발생하게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당분간은 아마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꾸어준 빚을 받아서 꾸어온 빚을 갚을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건전한 경제 논리는 훗날 더 큰 화(禍)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 기업들과 한국인들중 상당수는 꾸어온 빚과 돈놀이를 함으로써 채권국인 선진국들 보다도 더 여유있는 소비를 즐기고, 어학연수와 해외여행이라는 세계화 유행을 일으키고 빛좋은 개살구모양 일등국민(一等國民) 흉내를 내왔던 것이다. 70년대와 80년대에 얻게된 부지런하고 근면(勤勉)한 한국인의 이미지가 일순간에 허물어내려짐을 당했다.

    성실함에 바탕을 둔 건전한 경제성장(經濟成長)이 바람직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간과 인내(忍耐)를 요구한다. 필자가 D실업에 입사했던 77년에 한국 수출이 처음으로 100억불을 달성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1,500억불에 이르렀음은 누가 뭐라해도 참으로 괄목(刮目)할만한 성장이다. 한번 평안함을 맛본 사람이 다시 허리띠를 동이고 뼈를 깍는 노력을 경주(傾注)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지금 우리 한국민이 감당(勘當)해야할 일이 이것 이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서민층은 금모으기, 외제품 안쓰기 등 경제회생(經濟懷生)을 위한 대국민운동에 적극 협조적인데, 일부 부유층은 이 위기를 기회삼아 사채수익과 환차익등을 올리면서 한국의 경제위기(經濟危機)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 희희낙락(喜喜樂樂)하는 현실을 어찌 할 것인가?                                                     

    대기업에서 2년여 직장생활을 하고, 정부산하 경제연구기관에서 2년 근무하면서 그당시 군인정부하라서 그랬었는지 실적을 짜맞추기 위한 경제보고를 하라는 지시를 많이 받았다. 현 경제실정이 이러이러하니까 올해 경제성장률이 몇 %가 될 것이라고 전망(展望)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성장률(經濟成長率)이 몇 %가 되게 하기 위하여 통계숫자 짜맞추기 놀음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 후에 이런 일이 없어졌나 했는데, 한은(韓銀)에 다니는 친구 얘기를 들어보니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중간간부는 그 윗 사람의 질책이 두려워서 상향조정하여 보고하고, 또 그 윗 사람은 정부의 고위관리의 힐문(詰問)이 두려워서 또 아랫 사람에게 숫자 조정을 하라고 지시하고, ..., 해서, 숫자로 나타난 경제지수와 경제현실은 동떨어져있을 때가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한국의 현 경제위기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위정자(爲政者)에게만 있는가? 재벌(財閥)에게만 있는가? 은행의 경제자료 조사파트와 경제연구기관에게만 있는가? 국민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는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재벌의 방만(放漫)한 기업경영만이 문제가 아니라, 실적주의(實績主義)가 문제이요, 국민의 과소비(過消費)가 문제이요, 인기(人氣)에 편승(便乘)하여 의식화(意識化) 없는 세계화(世界化)를 추진한 위정자가 문제이요, 이에 자신의 형편과 능력은 고려하지 않고 빚을 내가며 언어연수다 해외유람이다 흥청거린 사람들이 문제이요, 이러한 국가적 위기상황에도 자기 실속만 차리는 파렴치(破廉恥)한 특권 사치층이 문제이다.

4. 경제위기와 관련한 한국 교회의 현재와 장래

    한국의 경제위기(經濟危機)가 1997년 11월에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서서히 그리고 평안한 가운데 이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다. 예상된 극한 고난이었으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처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서서히 데워지는 물속에서 ‘아아, 따끈따끈하다’고 기분좋아하다가 뎁혀죽는 개구리처럼 그렇게 따스하고 평안한 가운데 위기가 소리없이 한국민(韓國民)에게 찾아왔다. 올해 실업자(失業者)의 수가 200만명이 넘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선진국처럼 실업대책이 잘 된 나라에서도 이와같이 갑작스런 대량실업이 발생하면 그 대책이 어려운데 실업대책이 미비한 한국은 어떤 수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한국 경제와 사회에 위기의 조수(潮水)가 서서히 밀려들어 목부위를 넘어 입가에 이를 때까지 목청을 돋구워 선지자노릇을 해야 했을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들 역시 실적주의와 외형주의에 앞장 섰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들이 발표하는 교인숫자를 다 더하면 한국 총인구숫자 보다도 많다는 말이 있다. 헌데, 그 말이 사실이다. 교인의 숫자가 30,000여명이 된다는 교회를 연속 2주 출석해보았다. 5부 예배를 드리는 교회였는데, 후하게 쳐서 꽉 차면 2,000명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의 교회인데 교인수가 30,000여명이라고 공식 발표하니 이것부터 교인 수의 거품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교회가 되면 무엇하겠단 말인가? 누구를 위한 숫자 놀음인가? 주님을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당회장(堂會長) 목사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 할 것이다.

    불우한 이웃을 돕기에 앞장설 교회들이 이러한 일에는 푼돈으로 하고, 성도의 헌금의 대부분을 대형 성전 새로짓기에 사용한다. ‘우리의 경쟁상대 교회가 얼마를 들여서 얼마만한 교회건물을 지었는데 우리가 질소냐? 우린 좀 더 크게 짓자!’ 열심히 거두어 들인다. 어느 교회는 마이크 시스템만 몇 천만원짜리라 하여 입을 크게 벌렸었는데, 어느 새로 대형성전을 건축하는 교회에서는 1억여원을 들여서 마이크 시스템을 갖춘다는 신문기사를 보면서 분한 마음이 듦은 어떤 연유인가? 시기하는 마음일까? 이것이 외형주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100만명이상이 이미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내몰리고 있는데, 한국에서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해야할 교회들이 그들을 위해 마련하는 대응책이 무엇인가? 그들은 대답한다. ‘교회의 사명은 육적인 배고품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궁핍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맞다. 그러나,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그러면, 영적인 배고품과 목마름을 채워주고 있는가? 한국의 대형교회에서는 신앙은 모범이나 가난하면 장로도 될 수 없다. 어떤 교회에서는 1,000명의 권사후보를 추천하고는 그들에게 기부금을 내라고 한다. 일정액의 기부금을 낼 형편이 못되는 사람은 권사가 될 수 없다. 본인이 (명예) 직분에 감사하여 예물을 드림이야 누가 뭐라겠는가만, 일정 액수가 직분자가 되기 위한 한 조건이어서야 어찌 하겠는가? 이것이 영적인 갈증과 허기를 채워주는 교회의 모습인가? 대통령 조찬기도회에 뽑혀서 갔다온 목사님들은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렇지, 역시 나는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 교계의 지도자이지!’ 그러나, 그 목사님들이 한국의 영적 지도자로서 대통령을 만나서는 무슨 건의를 드렸는가? 대통령의 아들이 온갖 인사에 관여하고, 이권에 개입하고, 대기업들을 주무르고, 안기부에 자기 직계를 마련해 놓았다는데 그것이 대통령과 다른 아무도 모르게 어느날 갑자기 되어질 수 있는 일인가? 영적인 지도자라는 소리는 듣고 싶어하면서, 어찌 영적인 지도자의 역할은 감당하고자 하지 않는가?

    한국의 경제위기를 계기(契機)로 한국 교회들이 새로운 각성기(角星祺)로 접어들어야 할 것이다. 신사참배(紳士參拜)와 같이 하지 않을 것을 한 것만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니라, 영적 책임을 맡은 교회들이 한국민과 사회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도 큰 죄(罪)이다.  그들 (모두는 아닐 것이지만) 스스로가 망국(亡國)의 길에 앞장을 섰으니 철저히 회개(悔改)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한국의 경제위기를 넘기는데 앞장서야 한다. 그 해결책이 무엇인가? 건전(健全)한 경제원리와 정책의 해법이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경제원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경제계획이 무엇인가’ 말씀해주고 계시다.

    하나님의 경제계획(=경륜)은 인간구원(人間救援)이라고 했다. 이 시대상황(時代狀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의 경제계획도 인간구원이다. 영적인 구원이 물론 일차적인 목표이지만, 경제적 빈곤(貧困)으로 신음(呻吟)하고 자살(自殺)로까지 치닫는 이웃을 외면(外面)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양의 반열(班列)에 선 사람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태 25:35-36) 말씀하실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교회가 모으기에 열심이었다면 이제는 ‘나누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재벌(敎會財閥)로서 발돋음하고 대형교회 목사라는 특권의식을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그 모범을 따르는 진정한 주의 종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균(平均)의 경제원리’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첫째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그렇다. 다섯 개의 떡덩이와 두 마리의 물고기는 한 사람의 점심식사 분량이지만 이를 떼서 나눌 때 5,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에 남기는 기적이 일어났다. 주님의능력을 믿고 선포하는 교회는 인간의 얕은 계산방법을 버리고 주님의 경제원리에 따라 경세제민(經世濟民)에 앞장서야 한다. 둘째는, 예수님의 생애(生涯) 자체가 평균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말씀한다.  대형교회는 ‘주님의 이름’이라는 미명(美名)하에 교회의 부(富)를 자신의 몸체 불리기에 무익(無益)하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원래 부요(富饒)한 자이나 가난하게 되신 주님의 모범(模範)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 위에 교회는 크리스천의 경제윤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것은 부정한 이익을 취함이 아니요, 지나친 낭비의 삶을 사는 것도 아니요, 근면하고 분수에 맞는 적절한 삶을 사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허례허식의 삶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건전하고 모두의 형편이 좋아지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지혜롭고 선한 청지기(=경제인 혹은 경영인)의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나에게 주어진 재물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므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시간 역시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므로 부지런히 내게 맡기신 달란트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서 경영(經營)하는 삶을 살도록 교회가 앞장서서 가르쳐야 할 것이다.



           (1998년 6월 6일부터 7월 11일까지 미주크리스찬 신문[The Christian Press]에 게재)


"제비뽑기에 관한 성서적 고찰"

"제비뽑기에 관한 성서적 고찰"


    교회의 제직선출이라든가 기타 교회의 중요한 사업 결정에 제비뽑기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목사님들이 있다. 과연 교회 내에 구약성경에 종종 등장하는 것과 같은 제비뽑기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혹, 그렇다면, 제비뽑기는 어떠한 경우에 어떠한 목적으로 활용해야 할까? 이와 관련하여 성경과 사해문서(Dead Sea Scrolls) 속에서의 제비뽑기의 용례와 그 변천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제비뽑기의 어원적 의미
    제비뽑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랄'의 본래의 문자적 의미는 제비뽑기를 위해 사용된 조약돌 혹은 작은 돌이다. 의혹이나 다툼이 있는 경우, 몇몇 사람이 나누어가질 몫이 있을 때, 제비뽑기로 결정하는 관습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백성들만 행했던 관습이 아니라, 이스라엘 이외 다른 고대의 중·근동 국가들과 헬레니즘 문화권의 국가들과 또한 라틴 문화권의 국가들에서도 행해졌다. 똑같은 제비뽑기지만 그들이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들의 관습, 문화, 환경과 믿음에 따라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를 그들이 갖고 태어난 운명 혹은 그저 그들 앞에 우연히 전개된 재수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제비뽑기의 결과를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위한 섭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유대인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공정한 응답을 주시리라는 기대감으로 제비뽑기가 사용되었다. 제비뽑기의 방법 혹은 형태에 대해서는 구약성경에 분명한 서술이 없다. 이 제비뽑기에 사용된 도구(예를 들면, 주사위 같은 것)는 용기에 담겨져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2. 구약성경에서의 제비뽑기의 개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비뽑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분명하게 계시하시리라고 믿었다. 꿈이나 선지자들의 예언과 함께(삼상 28:6),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응답이요 최종적인 결정으로 받아들여졌고, 해서 어떠한 항소도 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제비뽑기를 자주 사용했는데, 특별히 공평한 결정을 얻기 위해 사용했다. 게다가, 제비뽑기는 이용하기가 쉬웠고, 해석함에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와 성전에서의 예식적인 제비뽑기는 점차적으로 예언적 설교와 토라(모세5경: 하나님의 지시사항)의 제사장적 해석으로 대체되어졌지만(호세아 4:12), 일상생활면에서는 계속적으로 행해졌다. 성례의 제비뽑기인 우림과 둠밈은 제사장의 규례가 마련될 때 즈음에는 그 본래적 기능을 상실하고, 다만 대제사장의 재판 권한의 상징으로 그의 의복 속에 넣어 간직되었다.
    구약성경에서의 고랄은 ① (각 지파와 가족에 대한) 토지분배(민수기 26:55,56; 여호수아 18:6,, 21:4)를 위해서 행하는 제비뽑기; ② 할당되거나, 분할되거나, 지정된 것--특히 토지의 할당된 부분 그 자체(여호수아 15:1, 16:1, 17:1, 시편 125:3, 미가 2:5); ③ 봉사, 의무나 징계를 지우기 위한 제비뽑기(레위기 16:8, 역대상 24:5, 느헤미야 11:1, 사사기 20:9, 요나 1:7, 나훔 3:10, 오바댜 11, 요엘 3:2), ④ 보상 혹은 보응(=몫)(이사야 17:14, 예레미야 13:25, 다니엘 12:13); ⑤ 인간의 분깃, 운명 혹은 운, 하나님의 결정(시편 16:5, 이사야 34:17)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사해문서에서의 제비뽑기의 개념
    사해문서에서 고랄은 구약성경에서와는 다소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문자적인 의미로서 제비뽑기 행위의 뜻으로 사용되었다기 보다는 은유적 혹은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사해문서에서의 고랄은 여러 가지 상징적 혹은 은유적인 뜻을 갖고 있는데, 그 주요한 것들은 ① 인간의 운명, ② 종말론적 보상과 보응(징계)으로서의 몫, ③ 하나님의 결정을 반영하는 공동체의 결정, ④ 빈도나 횟수(times), 혹은 때(time)의 의미 등이다. 쿰란(Qumran) 문서의 이원론적 성격으로, 이는 또한 집단, 떼, 파당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자신들을 빛의 자녀들, 의의 자식들이라고 여긴 쿰란공동체 사람들의 종말론적 소망이 이 고랄이라는 단어에 담겨져 있다.

4. 신약성경에서의 제비뽑기의 개념
    신약성경에서 히브리어 고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이로스(κλήρος)는 주로 제비뽑기를 의미한다(마가 15:24, 행전 1:15-26). 사도행전 1:26에서 보는 바와 같이 초대교회 사도들과 제자들은 가룟유다를 대체할 사도를 선택하기 위하여 제비뽑기를 했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적인 제비뽑기였는가 혹은 아니였는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쟁이 있다. 대부분의 성경주석가들은 제비뽑기가 빈번하게 사용되어져 왔으므로 유대사회에서 사도의 선출에도 그러한 방법이 기대되었을 것으로 보지만, 부분적인 증거는 “제비뽑기에 의한 중요한 직분자의 선택이 이방 헬레니즘 사회에서는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었으나 유대주의에서는 기대되지 않았다”고 반론한다. 베얼즐리(W. A. Beardslee)는 종말론적 유대인들의 집단인 쿰란공동체가 제비뽑기를 은유적 의미(lot-metaphor)로 사용했다고 지적하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도 제비뽑기를, 쿰란공동체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결정에 대한 거울로서 공동체에 의한 결정의 의미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5.  결어: 교회 내에서 문자적 의미의 제비뽑기는 유익한가? 그 한계는?
    우리는 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결정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우리 앞에 밝히 보일 때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경우에는 아무리 기도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 알 수 없는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세기 교회 내에서의 제비뽑기의 사용이 보다 겸손하고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함이라면 이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 이미 하나님의 모든 섭리와 계획을 아는 채 하면서, 제비뽑기를 사용한다면, 이는 유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교회에 심각한 해를 가중시키는 결과만 낳을 것이다.
    제비뽑기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성경말씀 속에서, 기도를 통하여, 환경 속에서, 제 삼자를 통하여, 혹은 하나님의 작고 세미한 음성으로부터 하나님을 깨달아 알려고 힘쓰다가 도저히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깨달아 알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제비뽑기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알게 하심을 믿고 이를 행할 수 있으면, 제비뽑기란 방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그러한 겸비한 마음을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그 분의 뜻을 알게 하시리라 믿는다.
    제비뽑기는 만능이 아니다.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을 알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궂이 이를 실시하여 혼선을 빚을 필요 또한 없다. 구약성경에서 제비뽑기를 실시한 경우의 대부분이 의혹이 있는 때, 혹은 사람이 임의로 결정하면 다툼의 소지가 있는 때였다(지파간 토지분배, 성전에서 봉사의 일, 제사장의 성소에 들어가는 일등).  교회 내에서, 제직을 선출할 때에, 교인들이 어느 정도인선하여 안수집사후보나 장로후보의 수를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의 수에 어느 정도 접근시켰을 경우에 제비뽑기를 사용하면 이는 유익을 줄 수 있다. 웬만한 목회자라면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자리인 노회장이나 총회장의 선출에 적당한 후보자를 먼저 인선한 다음에 이들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실시한다면 이는 유익이 될 것이다.

    기도하고 실시하는 제비뽑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할 바가 없다. 반면에, 기도하고 행사한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한 결정에 승복하지 못하는 사람이 기도하고 제비뽑기를 했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다. 설령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재수’로 돌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교회의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문자적인 제비뽑기의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않을 것인가 보다도, 문자적 제비뽑기이건 상징적 제비뽑기(사람의 믿음의 결정을 하나님의 결정으로 받아들임)이건 우리가 그 결과에 승복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1996년 6월 1일-8일 미주크리스찬 신문[The Christian Press]에 게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