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위기를 계기로 본 성경의 경제원리"
1. 성경에 나타난 ‘경제(오이코노미아: οἰκονομία)’의 의미
한국에 경제위기가 닥치자, 많은 사람들이 ‘경제학이 무엇인가?’ 하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경제원론 교과서에 보면 ‘경제학은 인간의 경제행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 정의하기도 한다. 자원의 희소성(scarcity)을 전제하고 있는 경제학은 ‘사람의 필요와 소용에 따라, 희소한 자원을 최적으로(optimal) 이용하기 위하여, 행하는 선택(choice)과 행동(action)에 관해서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소비자(consumer)의 소비경제행위와 생산자(producer)의 생산경제행위, 소비자와 생산자가 만나는 시장에서의 시장경제행위를 다루는 분야를 미시경제학(microeconomics) 이라 하고, 국가차원에서 재정정책(fiscal policy)과 금융정책(monetary policy)을 적절히 운용하여 물가와 임금, 고용, 이자율 등의 조정을 다루는 분야를 거시경제학(macroeconomics)이라고 부른다. 요즘 사람들이 관심을 많이 갖는 국제무역(international trade)도 이 거시경제학에 포함된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경제행위는 미시경제학이나 거시경제학에서와 같이 재화(財貨)와 직접·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행위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광의(廣義)의 경제행위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고 하는 단어에서 보는 대로 한 나라를 움직이고 백성을 다스리고 구제(救濟)하는 전반적인 통치·행정행위를 의미한다. 공자의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도 말하자면 경제행위의 전반이라 할 수 있다. 수신(修身)은 개인의 경제원리(individual economic principle)요, 제가(齊家)는 가정의 경제원리(domestic economic principle)요, 치국(治國)은 국가의 경제원리(nation's economic principle)요, 평천하(平天下)는 세계의 경제원리(global economic principle)를 제시하여주는 것이다.
경제(economy)란 말은 헬라어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에서 유래되었다. 성경에서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의 일차적인 의미는 ‘가계 혹은 가사의 경영,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한 경영, 관리 및 감독, 혹은 경영자, 감독자, 청지기(οἰκονόμος)의 직무’를 의미한다. 누가복음 16:2-4에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의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고 했는데 여기서 청지기의 사무(16:4), 청지기의 직분(16:3, 4)이 경제(經濟)란 말에 해당한다. 경제를 맡은 청지기(οἰκονόμος)는 현대적 표현으로 하면 (전문(專門)) 경제인(經濟人) 혹은 경영인(經營人)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로, 경제(οἰκονομία)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증거의 사명 혹은 복음증거를 위한 청지기, 관리자(管理者)의 직분(職分)’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9:17에서 바울은 “내가 내 임의로 이것(=복음을 전함)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임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직분(職分)을 맡았노라”고 했는데, 여기서 직분은 성경적 경제인(=복음증거자)의 사명을 뜻한다.
셋째로, 성경에서 경제(οἰκονομία)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비된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경륜’이란 뜻을 포함한다. 곧, 하나님의 경세제민(經世濟民)이라 할 것이다. 에베소서 1:9에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plan, RSV)을 위하여” (Greek 성경은 1:10...εἰς οἰκονομίαν τού πληρώματος); 3:2에 “하나님의 그 은혜의 경륜(stewardship, RSV)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 3:9에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plan, RSV)이 어떠한 것을”에서 경륜(經綸)은 오이코노미아(οἰκονομία)의 번역인데, ‘하나님의 경제’ 혹은 영어성경이 plan으로 번역했듯이 ‘하나님의 경제 (혹은 경세제민) 계획’을 뜻한다. 골로새서 1:25에서 “하나님의 경륜(office, RSV)을 따라”고 함과 디모데전서 1:4에서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training, RSV)을 이룸보다”라고 함도 하나님의 인간구원(人間救援)이란 경세제민 (혹은 경제) 계획 또는 정책을 뜻한다.
2. 성경의 경제원리: 평균화 경제원리에 따른 공생주의
자본주의 사회를 사는 인간(소비자 혹은 생산자)의 경제원리는 극대화(maximization) 혹은 최적화(optimization)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은 효용(效用) 혹은 만족(滿足)을 극대화하는 삶을 살아간다. 현대인에게 만족의 척도는 흔히 돈의 많고 적음이다. 직장을 선택할 때도 돈을 많이 준다고 하면 다른 조건들은 대충 받아들인다. 또, 기업은 이윤극대화를 위한 경영을 한다. 더 큰 이윤을 얻기 위하여 때로는 경쟁사의 상품을 비방하고, 또 부정한 방법으로 판매이익을 늘이기도 한다. 그러나,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제원리는 극대화(極大化)가 아닌 평균화(平均化=balanced out 혹은 averaged out)이다. 하나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려 주시고 그들에게 이를 거두라고 명하셨다. 이스라엘 자손이 들판에서 만나를 거둘 때 어떤 이는 많이 거두고 또 어떤 이는 적게 거두었으나, 출애굽기 16:18에 보면,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고린도 교인들에게 모금하라고 할 때, 그는 하나님의 이 ‘평균(平均)의 경제원리’을 설명한다. 고린도후서 8:12-14에서,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함을 보충함은 저희의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J. Calvin)도 평균의 경제원리에 대해서 말할 때, “부한 자는 그들의 물질적 부를 가난한 자와 나누어 갖도록 부르심을 받았고, 가난한 자는 영적 부를 부자와 나누어 갖도록 부르심을 받았다”고 했다. 따라서 부자는 가난한 자들에게 물질적 풍요를 나누어주는 일군(διάκονος: minister 혹은 servant)이요, 가난한 자는 영의 풍요로움을 전하는 그리스도의 종(대리자=vicar)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될 때, 그 사회는 물질적, 영적인 부가 평균화되고 모두가 형편이 더 좋아지는(better off) 사회가 될 수 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공유생활(common life: Commonism=공생주의)을 하였다. 사도행전 2:44이하에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라는 한 몸의 지체로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생활을 한 것이다. 초대교회의 공생주의(Commonism)는 평균화 경제원리에 따른 생활이다. 자본주의(Capitalism)는 각자가 자신의 능력에 따라 벌어서 자기가 번 것으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소비하는데, 한 가지 단점은 빈부의 격차가 갈수록 커진다는 것이다. 공산주의(Communism)는 각자의 능력에 상관없이 똑같이 벌어 똑같이 사용하자는 것인데, 이상적인 것 같지만 능력이 많은 사람의 일할 의욕을 저하시켜 생산성(productivity)을 떨어뜨리고 따라서 사회 전체가 빈곤(貧困)하게 된다.
그러나, 평균화의 경제원리가 실현되는 사회는 개인의 능력이나 성취욕을 제한하거나 무시하는 공산주의와는 근본이 다르다. 이는 자본주의 체제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하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자본주의의 취약점을 보완하게 한다. 평균화 경제원리의 실행은 정부나 기타 권력기관의 강제적 혹은 물리적인 법집행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발적이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린도후서 8:1-5: 마게도냐 교회의 모범). 공생주의(Commonism)는 자기 능력껏 일하여 일한 만큼 벌어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 나누고 통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평균화 경제원리에 따른 삶이라 할 것이다.
3. 한국의 경제위기: 무엇이 문제인가?
1997년 11월이후 한국이 맞고있는 이 경제위기는 갑자기 불어닥친 폭풍(暴風)같지만 사실은 그동안 쌓여온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현실로 나타난 것이라고 표현함이 옳을 것이다. 한국을 방문(訪問)할 때마다 느낀 의문은 ‘어떻게 한국 내에 있는 사람들의 씀씀이가 이렇게 클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100불은 모처럼 마음먹지 않으면 쓸 수 없는 큰 돈인데, 한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서너명의 점심 한끼 값으로 10만원쯤은 큰 부담 없이 지불함을 보았다. 필자가 한국을 떠난 80년대 초만 하더라도 아직 ‘마이카(my car)’ 시대가 아니라 고속도로 휴게소에 그렇게 개인 차량들이 많지 않았는데 10년뒤에 본 한국 고속도로와 휴게소에는 개인 차량으로 초만원을 이루고있음에 한편으로는 ‘한국경제가 이만큼 부강(富强)해졌고 국민들의 삶에 여유가 생겼구나!’ 하는 자랑스러움과 뿌듯함이 들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과연 현재 한국민의 삶이 미국인이나 일본인의 삶보다도 나아졌단 말인가?’ 하는 질문이 가시지 않았다. ‘세계 최강의 경제국이라고 하는 미국인들도 전반적으로 이런 여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경제강국으로 급성장한 일본인들 개인의 삶은 높은 물가고로 상당히 쪼들린다고 하는데, 선진국을 향하여 발돋음하고자 하나 아직은 경제강국이 아닌 한국의 국민들만이 유독 이와같은 여유를 즐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하였다.
어학연수라는 명목으로 상당수의 한국학생들이 유행따라 (덤으로) 유학 옴을 보아왔다. 그러나, 그들이 하는 일을 눈여겨보면서 과연 이러한 언어연수가 필요한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내의 웬만한 영어학원에 다니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영어를 배울 수 있을 터인데, 과반수이상이 한국인들로 구성된 어학연수반의 극히 기초적인 영어수업이 생활비와 기타비용을 포함하여 년 2만불 상당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물론 소수의 착실한 학생들도 있지만, 많은 학생들이 몰려 다니며 여행이나 즐기고 또 다른 여흥꺼리를 찾는 것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듦이 사실이다. 교회를 나오는 언어연수 학생들(이들은 그나마 착실한 학생들이다)에게 가끔 묻는다. 그들도 여기에서 배우는 것이 별로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언어연수가 마치 무슨 자격증과도 같이 회사에 취직하는데 도움이 되기때문에 온다고 하는 학생들도 더러 있다. 이 얼마나 낭비적(浪費的)인 사회유행인가? 더욱 더 문제꺼리로 생각된 것은 S, H, D 그룹등 대기업 직원들의 언어연수이다. 이들에게는 일인당 일년에 4-5만불의 어학연수 비용이 지불된다고 하는데 어학연수를 하러 왔다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때로는 분(憤)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영어의 수준이 기초적인 것이라 아예 어떤 사람들은 수업도 적당히 걸르면서, 끼리 끼리 한국에서 못다한 골프나 치러 다니고, 물건사기와 여행으로 시간을 소모했다. 이것이 YS정부의 세계화 시책에 발맞춘 언어연수의 현주소(現住所)였다. 그러나, 의식화(意識化)가 선행(先行)되지 않은 세계화(世界化)는 꼴불견만 초래할 것이다.
지난 해 8월에 선배 목사님의 경비까지 대주는 초청으로 선교대회 참석차 영국을 5일간 방문할 기회를 가졌다. 영국까지 왔다가 파리(Paris)를 못보고 돌아가면 후회할 것 같아 큰 마음 먹고 자비(自費)를 들여 하루를 파리에서 머물기로 작정하고 새벽 6시 반에 떠나는 파리행 유로스타(Eurostar)를 타고 도버해협을 물밑으로 지나 세시간 만에 빠리에 도착해서 싸구려 호텔에 짐을 풀고 파리거리를 온종일 걸어다녔다. 놀라운 것은 만나는 동양사람의 80% 이상이 한국사람이라는 사실이었다. 대학생처럼 보이는 청년 남녀들에서 시작하여 30-50대 부인네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길을 걸을 때 들려오는 한국말이 반갑게 여겨지지 않은 나의 심사(心思)가 어찜인지 모를 일이었다. 관광그룹을 만나면 그들은 거의 틀림없이 한국사람들이었다. 60-70년대 일본 관광객들이 유럽을 휩쓸고 다녔다는데, 한국인이 일본인의 전철(前轍)을 밟고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날 영국으로 돌아오는 오후 1시 유로스타(Eurostar)에 30-40명씩 되는 동양인 관광그룹 두 팀이 승차했는데 두 팀 모두 한국인들이었다. 그들의 대화가 귀에 들려온다. “나는 스위스, 오스트리아, 프랑스등 현재까지 아홉 개국을 구경했는데, 이번이 두 번째 유럽여행이라서 그런지 어색하지 않다. 다음에는 어디 어디를 가야겠다” 하면서 서로 자기의 여행 편력(遍歷)을 자랑하고 돈에는 전혀 구애(拘碍)됨이 없는 듯 보였다. 그들의 대화를 귓전으로 들으면서, 한국인 여행 안내원이 혹시 급행료라도 지급했나 아니면 단체 손님을 우대하는 규정이 있는지 두 그룹 모두 먼저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보다 앞서서 승차구를 빠져나감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나의 동포란 것이 자랑스럽지 않고 내가 이곳에 이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이 부끄럽게까지 여겨졌다. 나의 마음 한구석에 우려(憂慮)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한국이 이렇게 가다가는 정말 망하지?!”
대기업과 은행들이 미국, 일본, 서방 경제선진국들로부터 상업차관(商業借款)을 도입(導入)해와서는 신규투자를 하는데 사용하는 대신에 동남아시아 국가등에 돈놀이를 해온 것도 문제이다. 인도네시아에 60억불의 채권이 있고 기타 다른 동남아국들에도 일정액의 채권이 있음에 아연실색(啞然失色)하게 된다. 한국보다 못사는 나라에 돈을 빌려준 것이 잘못이 아니라, 돈놀이해서 돈을 벌려고 한 그 의식구조가 문제이다. 한국의 외환위기는 실은 동남아의 외환위기만 아니면 안 당해도 됐을 것인데 동남아의 위기로 인해서 발생하게 됐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당분간은 아마 그러했을지도 모른다. 꾸어준 빚을 받아서 꾸어온 빚을 갚을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건전한 경제 논리는 훗날 더 큰 화(禍)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 기업들과 한국인들중 상당수는 꾸어온 빚과 돈놀이를 함으로써 채권국인 선진국들 보다도 더 여유있는 소비를 즐기고, 어학연수와 해외여행이라는 세계화 유행을 일으키고 빛좋은 개살구모양 일등국민(一等國民) 흉내를 내왔던 것이다. 70년대와 80년대에 얻게된 부지런하고 근면(勤勉)한 한국인의 이미지가 일순간에 허물어내려짐을 당했다.
성실함에 바탕을 둔 건전한 경제성장(經濟成長)이 바람직함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시간과 인내(忍耐)를 요구한다. 필자가 D실업에 입사했던 77년에 한국 수출이 처음으로 100억불을 달성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1,500억불에 이르렀음은 누가 뭐라해도 참으로 괄목(刮目)할만한 성장이다. 한번 평안함을 맛본 사람이 다시 허리띠를 동이고 뼈를 깍는 노력을 경주(傾注)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지금 우리 한국민이 감당(勘當)해야할 일이 이것 이외에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서민층은 금모으기, 외제품 안쓰기 등 경제회생(經濟懷生)을 위한 대국민운동에 적극 협조적인데, 일부 부유층은 이 위기를 기회삼아 사채수익과 환차익등을 올리면서 한국의 경제위기(經濟危機)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하며 유유자적(悠悠自適), 희희낙락(喜喜樂樂)하는 현실을 어찌 할 것인가?
대기업에서 2년여 직장생활을 하고, 정부산하 경제연구기관에서 2년 근무하면서 그당시 군인정부하라서 그랬었는지 실적을 짜맞추기 위한 경제보고를 하라는 지시를 많이 받았다. 현 경제실정이 이러이러하니까 올해 경제성장률이 몇 %가 될 것이라고 전망(展望)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성장률(經濟成長率)이 몇 %가 되게 하기 위하여 통계숫자 짜맞추기 놀음을 해야 할 때가 있었다. 그 후에 이런 일이 없어졌나 했는데, 한은(韓銀)에 다니는 친구 얘기를 들어보니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중간간부는 그 윗 사람의 질책이 두려워서 상향조정하여 보고하고, 또 그 윗 사람은 정부의 고위관리의 힐문(詰問)이 두려워서 또 아랫 사람에게 숫자 조정을 하라고 지시하고, ..., 해서, 숫자로 나타난 경제지수와 경제현실은 동떨어져있을 때가 비일비재(非一非再)했다.
한국의 현 경제위기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위정자(爲政者)에게만 있는가? 재벌(財閥)에게만 있는가? 은행의 경제자료 조사파트와 경제연구기관에게만 있는가? 국민에게는 전혀 책임이 없는가?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재벌의 방만(放漫)한 기업경영만이 문제가 아니라, 실적주의(實績主義)가 문제이요, 국민의 과소비(過消費)가 문제이요, 인기(人氣)에 편승(便乘)하여 의식화(意識化) 없는 세계화(世界化)를 추진한 위정자가 문제이요, 이에 자신의 형편과 능력은 고려하지 않고 빚을 내가며 언어연수다 해외유람이다 흥청거린 사람들이 문제이요, 이러한 국가적 위기상황에도 자기 실속만 차리는 파렴치(破廉恥)한 특권 사치층이 문제이다.
4. 경제위기와 관련한 한국 교회의 현재와 장래
한국의 경제위기(經濟危機)가 1997년 11월에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서서히 그리고 평안한 가운데 이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다. 예상된 극한 고난이었으면 정신을 바짝 차리고 대처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서서히 데워지는 물속에서 ‘아아, 따끈따끈하다’고 기분좋아하다가 뎁혀죽는 개구리처럼 그렇게 따스하고 평안한 가운데 위기가 소리없이 한국민(韓國民)에게 찾아왔다. 올해 실업자(失業者)의 수가 200만명이 넘을 것이라고 예상한다. 선진국처럼 실업대책이 잘 된 나라에서도 이와같이 갑작스런 대량실업이 발생하면 그 대책이 어려운데 실업대책이 미비한 한국은 어떤 수로 이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한국 경제와 사회에 위기의 조수(潮水)가 서서히 밀려들어 목부위를 넘어 입가에 이를 때까지 목청을 돋구워 선지자노릇을 해야 했을 한국의 대형교회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이들 역시 실적주의와 외형주의에 앞장 섰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교회들이 발표하는 교인숫자를 다 더하면 한국 총인구숫자 보다도 많다는 말이 있다. 헌데, 그 말이 사실이다. 교인의 숫자가 30,000여명이 된다는 교회를 연속 2주 출석해보았다. 5부 예배를 드리는 교회였는데, 후하게 쳐서 꽉 차면 2,000명이 들어갈 정도의 크기의 교회인데 교인수가 30,000여명이라고 공식 발표하니 이것부터 교인 수의 거품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렇게 해서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교회가 되면 무엇하겠단 말인가? 누구를 위한 숫자 놀음인가? 주님을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당회장(堂會長) 목사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 할 것이다.
불우한 이웃을 돕기에 앞장설 교회들이 이러한 일에는 푼돈으로 하고, 성도의 헌금의 대부분을 대형 성전 새로짓기에 사용한다. ‘우리의 경쟁상대 교회가 얼마를 들여서 얼마만한 교회건물을 지었는데 우리가 질소냐? 우린 좀 더 크게 짓자!’ 열심히 거두어 들인다. 어느 교회는 마이크 시스템만 몇 천만원짜리라 하여 입을 크게 벌렸었는데, 어느 새로 대형성전을 건축하는 교회에서는 1억여원을 들여서 마이크 시스템을 갖춘다는 신문기사를 보면서 분한 마음이 듦은 어떤 연유인가? 시기하는 마음일까? 이것이 외형주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100만명이상이 이미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내몰리고 있는데, 한국에서 영적 지도자의 역할을 감당해야할 교회들이 그들을 위해 마련하는 대응책이 무엇인가? 그들은 대답한다. ‘교회의 사명은 육적인 배고품을 채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궁핍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고.’ 맞다. 그러나, 한국의 대형교회들이, 그러면, 영적인 배고품과 목마름을 채워주고 있는가? 한국의 대형교회에서는 신앙은 모범이나 가난하면 장로도 될 수 없다. 어떤 교회에서는 1,000명의 권사후보를 추천하고는 그들에게 기부금을 내라고 한다. 일정액의 기부금을 낼 형편이 못되는 사람은 권사가 될 수 없다. 본인이 (명예) 직분에 감사하여 예물을 드림이야 누가 뭐라겠는가만, 일정 액수가 직분자가 되기 위한 한 조건이어서야 어찌 하겠는가? 이것이 영적인 갈증과 허기를 채워주는 교회의 모습인가? 대통령 조찬기도회에 뽑혀서 갔다온 목사님들은 어깨가 으쓱해진다. ‘그렇지, 역시 나는 자타가 인정하는 한국 교계의 지도자이지!’ 그러나, 그 목사님들이 한국의 영적 지도자로서 대통령을 만나서는 무슨 건의를 드렸는가? 대통령의 아들이 온갖 인사에 관여하고, 이권에 개입하고, 대기업들을 주무르고, 안기부에 자기 직계를 마련해 놓았다는데 그것이 대통령과 다른 아무도 모르게 어느날 갑자기 되어질 수 있는 일인가? 영적인 지도자라는 소리는 듣고 싶어하면서, 어찌 영적인 지도자의 역할은 감당하고자 하지 않는가?
한국의 경제위기를 계기(契機)로 한국 교회들이 새로운 각성기(角星祺)로 접어들어야 할 것이다. 신사참배(紳士參拜)와 같이 하지 않을 것을 한 것만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니라, 영적 책임을 맡은 교회들이 한국민과 사회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도 큰 죄(罪)이다. 그들 (모두는 아닐 것이지만) 스스로가 망국(亡國)의 길에 앞장을 섰으니 철저히 회개(悔改)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한국의 경제위기를 넘기는데 앞장서야 한다. 그 해결책이 무엇인가? 건전(健全)한 경제원리와 정책의 해법이 성경에 기록되어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경제원리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경제계획이 무엇인가’ 말씀해주고 계시다.
하나님의 경제계획(=경륜)은 인간구원(人間救援)이라고 했다. 이 시대상황(時代狀況) 가운데 존재하는 교회의 경제계획도 인간구원이다. 영적인 구원이 물론 일차적인 목표이지만, 경제적 빈곤(貧困)으로 신음(呻吟)하고 자살(自殺)로까지 치닫는 이웃을 외면(外面)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양의 반열(班列)에 선 사람들에게,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태 25:35-36) 말씀하실 것이다.
이제까지 한국교회가 모으기에 열심이었다면 이제는 ‘나누어주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교회재벌(敎會財閥)로서 발돋음하고 대형교회 목사라는 특권의식을 버리고,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그 모범을 따르는 진정한 주의 종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평균(平均)의 경제원리’를 몸소 실천하신 분이다. 첫째는, 오병이어의 기적이 그렇다. 다섯 개의 떡덩이와 두 마리의 물고기는 한 사람의 점심식사 분량이지만 이를 떼서 나눌 때 5,000명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바구니에 남기는 기적이 일어났다. 주님의능력을 믿고 선포하는 교회는 인간의 얕은 계산방법을 버리고 주님의 경제원리에 따라 경세제민(經世濟民)에 앞장서야 한다. 둘째는, 예수님의 생애(生涯) 자체가 평균케 하시기 위함이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라” 말씀한다. 대형교회는 ‘주님의 이름’이라는 미명(美名)하에 교회의 부(富)를 자신의 몸체 불리기에 무익(無益)하게 사용할 것이 아니라, 원래 부요(富饒)한 자이나 가난하게 되신 주님의 모범(模範)을 따라야 할 것이다.
그 위에 교회는 크리스천의 경제윤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것은 부정한 이익을 취함이 아니요, 지나친 낭비의 삶을 사는 것도 아니요, 근면하고 분수에 맞는 적절한 삶을 사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허례허식의 삶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건전하고 모두의 형편이 좋아지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지혜롭고 선한 청지기(=경제인 혹은 경영인)의 삶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나에게 주어진 재물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므로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웃을 위해 사용하고, 시간 역시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므로 부지런히 내게 맡기신 달란트를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님과 이웃을 위해서 경영(經營)하는 삶을 살도록 교회가 앞장서서 가르쳐야 할 것이다.
(1998년 6월 6일부터 7월 11일까지 미주크리스찬 신문[The Christian Press]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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