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February 11, 2012

"제비뽑기에 관한 성서적 고찰"

"제비뽑기에 관한 성서적 고찰"


    교회의 제직선출이라든가 기타 교회의 중요한 사업 결정에 제비뽑기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하는 목사님들이 있다. 과연 교회 내에 구약성경에 종종 등장하는 것과 같은 제비뽑기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 혹, 그렇다면, 제비뽑기는 어떠한 경우에 어떠한 목적으로 활용해야 할까? 이와 관련하여 성경과 사해문서(Dead Sea Scrolls) 속에서의 제비뽑기의 용례와 그 변천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제비뽑기의 어원적 의미
    제비뽑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랄'의 본래의 문자적 의미는 제비뽑기를 위해 사용된 조약돌 혹은 작은 돌이다. 의혹이나 다툼이 있는 경우, 몇몇 사람이 나누어가질 몫이 있을 때, 제비뽑기로 결정하는 관습은 매우 오래된 것이다.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백성들만 행했던 관습이 아니라, 이스라엘 이외 다른 고대의 중·근동 국가들과 헬레니즘 문화권의 국가들과 또한 라틴 문화권의 국가들에서도 행해졌다. 똑같은 제비뽑기지만 그들이 받아들이는 태도는 그들의 관습, 문화, 환경과 믿음에 따라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를 그들이 갖고 태어난 운명 혹은 그저 그들 앞에 우연히 전개된 재수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제비뽑기의 결과를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그들을 위한 섭리라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유대인들 중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공정한 응답을 주시리라는 기대감으로 제비뽑기가 사용되었다. 제비뽑기의 방법 혹은 형태에 대해서는 구약성경에 분명한 서술이 없다. 이 제비뽑기에 사용된 도구(예를 들면, 주사위 같은 것)는 용기에 담겨져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2. 구약성경에서의 제비뽑기의 개념
    이스라엘 사람들은 제비뽑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뜻을 분명하게 계시하시리라고 믿었다. 꿈이나 선지자들의 예언과 함께(삼상 28:6), 제비뽑기는 하나님의 응답이요 최종적인 결정으로 받아들여졌고, 해서 어떠한 항소도 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일상생활에서 제비뽑기를 자주 사용했는데, 특별히 공평한 결정을 얻기 위해 사용했다. 게다가, 제비뽑기는 이용하기가 쉬웠고, 해석함에 특별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하나님 앞에서와 성전에서의 예식적인 제비뽑기는 점차적으로 예언적 설교와 토라(모세5경: 하나님의 지시사항)의 제사장적 해석으로 대체되어졌지만(호세아 4:12), 일상생활면에서는 계속적으로 행해졌다. 성례의 제비뽑기인 우림과 둠밈은 제사장의 규례가 마련될 때 즈음에는 그 본래적 기능을 상실하고, 다만 대제사장의 재판 권한의 상징으로 그의 의복 속에 넣어 간직되었다.
    구약성경에서의 고랄은 ① (각 지파와 가족에 대한) 토지분배(민수기 26:55,56; 여호수아 18:6,, 21:4)를 위해서 행하는 제비뽑기; ② 할당되거나, 분할되거나, 지정된 것--특히 토지의 할당된 부분 그 자체(여호수아 15:1, 16:1, 17:1, 시편 125:3, 미가 2:5); ③ 봉사, 의무나 징계를 지우기 위한 제비뽑기(레위기 16:8, 역대상 24:5, 느헤미야 11:1, 사사기 20:9, 요나 1:7, 나훔 3:10, 오바댜 11, 요엘 3:2), ④ 보상 혹은 보응(=몫)(이사야 17:14, 예레미야 13:25, 다니엘 12:13); ⑤ 인간의 분깃, 운명 혹은 운, 하나님의 결정(시편 16:5, 이사야 34:17)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3. 사해문서에서의 제비뽑기의 개념
    사해문서에서 고랄은 구약성경에서와는 다소 다른 뜻으로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문자적인 의미로서 제비뽑기 행위의 뜻으로 사용되었다기 보다는 은유적 혹은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이다. 사해문서에서의 고랄은 여러 가지 상징적 혹은 은유적인 뜻을 갖고 있는데, 그 주요한 것들은 ① 인간의 운명, ② 종말론적 보상과 보응(징계)으로서의 몫, ③ 하나님의 결정을 반영하는 공동체의 결정, ④ 빈도나 횟수(times), 혹은 때(time)의 의미 등이다. 쿰란(Qumran) 문서의 이원론적 성격으로, 이는 또한 집단, 떼, 파당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자신들을 빛의 자녀들, 의의 자식들이라고 여긴 쿰란공동체 사람들의 종말론적 소망이 이 고랄이라는 단어에 담겨져 있다.

4. 신약성경에서의 제비뽑기의 개념
    신약성경에서 히브리어 고랄에 해당하는 헬라어 클레이로스(κλήρος)는 주로 제비뽑기를 의미한다(마가 15:24, 행전 1:15-26). 사도행전 1:26에서 보는 바와 같이 초대교회 사도들과 제자들은 가룟유다를 대체할 사도를 선택하기 위하여 제비뽑기를 했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적인 제비뽑기였는가 혹은 아니였는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쟁이 있다. 대부분의 성경주석가들은 제비뽑기가 빈번하게 사용되어져 왔으므로 유대사회에서 사도의 선출에도 그러한 방법이 기대되었을 것으로 보지만, 부분적인 증거는 “제비뽑기에 의한 중요한 직분자의 선택이 이방 헬레니즘 사회에서는 지극히 보편적인 것이었으나 유대주의에서는 기대되지 않았다”고 반론한다. 베얼즐리(W. A. Beardslee)는 종말론적 유대인들의 집단인 쿰란공동체가 제비뽑기를 은유적 의미(lot-metaphor)로 사용했다고 지적하고,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도 제비뽑기를, 쿰란공동체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결정에 대한 거울로서 공동체에 의한 결정의 의미로 사용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5.  결어: 교회 내에서 문자적 의미의 제비뽑기는 유익한가? 그 한계는?
    우리는 교회 내에서 여러 가지 일을 결정해야 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우리 앞에 밝히 보일 때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경우에는 아무리 기도하여도 하나님의 뜻을 잘 깨달아 알 수 없는 때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세기 교회 내에서의 제비뽑기의 사용이 보다 겸손하고 낮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함이라면 이는 많은 경우에 있어서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자신 이미 하나님의 모든 섭리와 계획을 아는 채 하면서, 제비뽑기를 사용한다면, 이는 유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교회에 심각한 해를 가중시키는 결과만 낳을 것이다.
    제비뽑기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성경말씀 속에서, 기도를 통하여, 환경 속에서, 제 삼자를 통하여, 혹은 하나님의 작고 세미한 음성으로부터 하나님을 깨달아 알려고 힘쓰다가 도저히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깨달아 알 수 없을 때, 하나님께서는 제비뽑기를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알게 하심을 믿고 이를 행할 수 있으면, 제비뽑기란 방법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우리의 그러한 겸비한 마음을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그 분의 뜻을 알게 하시리라 믿는다.
    제비뽑기는 만능이 아니다. 제비뽑기를 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분명하신 뜻을 알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궂이 이를 실시하여 혼선을 빚을 필요 또한 없다. 구약성경에서 제비뽑기를 실시한 경우의 대부분이 의혹이 있는 때, 혹은 사람이 임의로 결정하면 다툼의 소지가 있는 때였다(지파간 토지분배, 성전에서 봉사의 일, 제사장의 성소에 들어가는 일등).  교회 내에서, 제직을 선출할 때에, 교인들이 어느 정도인선하여 안수집사후보나 장로후보의 수를 교회에서 필요로 하는 사람의 수에 어느 정도 접근시켰을 경우에 제비뽑기를 사용하면 이는 유익을 줄 수 있다. 웬만한 목회자라면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자리인 노회장이나 총회장의 선출에 적당한 후보자를 먼저 인선한 다음에 이들을 대상으로 제비뽑기를 실시한다면 이는 유익이 될 것이다.

    기도하고 실시하는 제비뽑기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나타날 것을 믿는다면,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을 통해서도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지 못할 바가 없다. 반면에, 기도하고 행사한 하나님의 사람들에 의한 결정에 승복하지 못하는 사람이 기도하고 제비뽑기를 했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리가 없다. 설령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재수’로 돌릴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교회의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문자적인 제비뽑기의 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않을 것인가 보다도, 문자적 제비뽑기이건 상징적 제비뽑기(사람의 믿음의 결정을 하나님의 결정으로 받아들임)이건 우리가 그 결과에 승복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1996년 6월 1일-8일 미주크리스찬 신문[The Christian Press]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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