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을 읽고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이란 소설을 읽어보았다. 그 소설에는 신학도의 길을 가다가 중도하차한 민요섭이란 삼십대 초반의 한 인물이 등장한다. 이 사람의 피살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노트를 통해, 야훼 하나님보다 더 완전한 신을 찾고자 하는 그의 방황과 갈등이 알려진다. 1979년에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작품인데 이 소설을 통하여 이문열은 인간의 논리와 관념 속에서 완전한 신을 찾고자 하지만 결국 실패하고 만다.
완벽한 신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 구약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를 접하면서 갖는 의문은 한결같이 공통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는 전지전능하시다고 하는데 그 하나님이 어떻게 그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아담과 하와가 타락할 것을 모를 수 있었는가? 또한 그가 옛뱀의 미혹에 빠져 타락한 모든 책임을 인간의 자유의지에 돌리는데, 악에게 미혹되어 넘어지는 자유의지라면 그 인간의 의지 가운데는 이미 악의 요소가 들어있거나 하나님의 속성이 불완전 것이 아닌가?” 라는 것이다. 곧,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 책임이 아니라 그렇게 유혹에 쉽게 노출되게 만드신 ‘야훼’ 하나님의 책임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질문은 ‘하나님 나라’의 건설에 관한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땅에서 배고품의 문제와 질병의 문제, 기타 정치, 사회적 문제가 해결됨이 하나님 나라의 건설이요, 이러한 것이 해결되지 않는 내세의 ‘하나님 나라’는 무의미하다고 본다.
좀더 완전한 신을 발견하고 지상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중도하차한 신학도 민요섭에게는 성경 속에서 만나는 불완전한(?) 야훼 하나님과 예수님이 말씀하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보다 더 중요하게 보인다.
좀더 완전한 신의 발견을 위해서는 2세기 영지주의의 여러 갈래 중 하나인 오파이츠(Ophites, Serpent Worshipers: 뱀, 지혜의 계시자)를 따르고 지상의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는 일본의 실천신학자 가가와 도요히꼬의 주장을 따른다.
이문열은 민요섭을 통하여, 민요섭은 그의 노트에 기록된 그의 작품 속의 아하스 페르츠를 통하여 그들의 신에 대한 추구를 다루고 있다. 예수님과 비슷한 시대를 산 가상의 인물 아하스 페르츠는 야훼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에 회의를 제기하며 좀더 완전한 신의 발견--창조--을 위하여 먼 방황의 길을 떠난다.
아하스 페르츠는 이집트, 가나안 지방과 페니키아 해변, 히타이트 카르게미쉬 지방, 바벨론, 페르시아를 거쳐서 인도까지 갔다가 로마에 이르지만 그가 찾고자 했던 야훼보다 더 완벽한 신은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온다. 그는 야훼 속에서 이제껏 너무 일면만을 봄으로써 발견하지 못했던 온전한 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으로 십년의 방황의 세월 끝에 고향 땅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야훼 속에서 새로운 신의 발견과 부름을 위해서 ‘쿠아란타리아’란 광야로 나가 40일의 금식을 단행한다.
금식이 끝난 다음날, 그는 근처의 바위산 기슭에서 그처럼 40일 금식을 하고 있는 예수란 청년을 만나는데,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개한다.
아하스 페르츠는 이 예수란 청년이 과연 그와 온 이스라엘이 기대해온 메시아인가 시험하기 위해서 복음서에 마귀가 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존재가 메시아라는 생각은 현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의 메시아관이기도 하다. 곧, 이 세상에서의 풍요로운 빵과 기적과 지상의 권세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청년 예수는 이의 실현을 거부한다. 그 이후에도 아하스 페르츠는 군중 속에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예수의 능력을 보았기에 기적과 권세로서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라고 권고하고 강청하지만 예수는 번번히 거절한다. 결국 아하스 페르츠는 야훼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현되기를 원했던 메시아의 모습을 보지 못하자 철저히 그를 증오하며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죽는 것을 고소해 한다.
소설 속의 주인공 민요섭과 그를 철저히 따르는 조동팔은 아하스 페르츠의 방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아하스 페르츠가 중단한 완전한 신의 발견을 민요섭은 초기작품 뒤 7-8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다시 추구한다. 그들이 한 일이란 성경속의 ‘야훼’ 하나님을 온전한 신의 반쪽으로, 그리고 온전의 또 다른 반쪽 신을 등장시키는 그들의 성경 ‘쿠아란타리아’서를 만드는 것이다. 작가 이문열이 제시한 새로운 이원론적인 양성의 신은 기막힌 독창적인 발견인 것 같지만 기실은 영지주의자들이 2세기 중엽에 이미 제시한 이원론의 신을 소설화한 것일 뿐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바로는, 인간의 창조는 불완전한 신인 야훼에 의해서 이뤄지고 야훼는 인간의 맹목적인 복종을 원하여 지혜의 눈을 밝히는 선악과를 먹지 못하게 했지만, 지혜의 신 소피아(Sophia)는 그의 대리자 옛 뱀을 보내어 인간이 어리석은 창조자 야훼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참 자유와 지혜를 얻게 한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참 크리스천의 자유는 불완전한 신 야훼가 만들어놓은 율법의 사슬에서 벗어나 영지(Gnosis)라 표현되는 지혜의 깨달음으로 구속받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민요섭이 발견했다고 주장한 완전한 신은 온전을 이루는 두 반쪽의 신, 곧 선의 신 야훼와 지혜의 신의 조화로 이루어진다. 그 신은 “선악의 관념이나 가치판단에 관여하지 않는 신이며, 먼저 있은 존재를 뒤에 온 말씀으로 속박하지 않는 신이며,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시인하는 신이며, 천국이나 지옥으로 땅위의 삶을 간섭하지 않는 신이며, 복종과 경배를 원하지 않고 희생과 강요를 강요하지 않는 신이며, 우리의 지혜와 이성을 신뢰하며 우리를 온전히 자유케 하는 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온전한 신을 발견한 민요섭은 그 신으로 인하여 기쁨이 넘쳐나지 않는다. 인간의 관념과 이상 속에서 창조된 신은 더 이상 신이 아니요 다만 허구(虛構)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민요섭을 살해한 그의 추종자 조동팔의 입을 빌어서 그는 말한다. “우리 인간은 신 안에 남아 있었어야 했다. 불합리 하더라도 구원(救援)과 용서(容恕)는 끝까지 하늘에 맡겨두어야 했다.”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불합리하며 왜 모순이 많은 분으로 보일 때가 있을까? 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자되시는 분으로서 알고자 하고 믿고자 하지 않고 나의 논리의 작은 상자 속에 담을 수 있는 분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누군가의 소개로 이 책을 읽으며 많은 생각이 맴돌았는데, 시원하게 정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독교 신자건 비신자건 신에 대한 개념이 이문열의 소설을 통해 영향 받는건 부인할 수 없습니다. 신자의 입장에선 어쩌면 기괘한 반신주의를 접하면서 신앙 탈선의 대표적인 모습을 보게 돼고 , 비신자의 입장에선 신앙을 고대 퇴마사 류의 일원으로 격하시키며 흥미 따위로 치부하게 됩니다. 어느 입장이든 나의 신앙 행태를 고민해 볼 수 있는 소설이었습니다.
ReplyDelete이곳을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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