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October 10, 2026

십일조와 세금

십일조와 세금

 

십일조의 시작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십일조는 아브라함이 살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이다. 아브라함은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을 만났다. 창세기 14장 18–20절은 아브람이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은 후 자신이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준 일을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고 기록한다. 히브리서도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전리품 가운데 십분의 일을 주었다고 설명한다(히 7:2–10).

‘멜기세덱’(מַלְכִּי־צֶדֶק, Malkî-ṣedeq)이라는 이름은 문자적으로 “의의 왕”이라는 뜻이다. 그는 아론 계열의 제사장이 아니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 시대의 인물로서 아론보다 훨씬 앞서 살았으며,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제사장직은 훗날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세워진 레위 지파와 아론 계열의 제사장직과는 구별된다.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보여 주는 중요한 모형으로 이해한다(히 5:6–11; 6:20–7:17). 멜기세덱은 그의 이름의 뜻에 따라 “의의 왕”이며, 살렘 왕이라는 점에서 “평강의 왕”으로 설명된다(히 7:2). 또한 히브리서는 성경에 그의 족보나 제사장직의 시작과 끝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사용하여 그를 하나님의 아들과 닮은 인물로 묘사한다(히 7:3). 그러므로 멜기세덱 자신이 문자적인 의미에서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기보다, 그는 아론의 계통에 속하지 않으면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구약성경의 모형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이 아니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히 5:6; 6:20; 7:17).

그 후 성경에서 십일조가 다시 언급되는 것은 야곱이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중 벧엘에서 하나님께 서원할 때이다. 야곱은 꿈에서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약속을 들은 후 창세기 28장 20–22절에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서원하였다.

야곱의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야곱 자신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고, 여행길에서 보호하시며,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시고, 마침내 자신을 아버지의 집으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하였다. 따라서 야곱의 십일조 약속은 조건적인 형태의 서원이었다. 야곱은 먼저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과 복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어 자신을 안전하게 돌아오게 하시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 가운데 십분의 일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야곱은 자신이 앞으로 얻게 될 소유와 재물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정하고, 그 가운데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겠다고 서원한 것이다.

십일조의 목적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십일조를 드리도록 명하신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 십분의 일을 자신에게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여 드리게 하시고, 나머지 십분의 구를 자신의 백성이 생활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허락하셨다. 레위기 27장 30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또한 가축의 십일조에 대해서도 “모든 소나 양의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고 말씀한다(레 27:32).

따라서 십일조의 근본적인 의미는 단순히 자신의 소득 가운데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자신이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림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고, 나머지 십분의 구 역시 자신의 절대적인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활하고 관리하도록 맡겨 주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일조는 하나님의 소유권과 인간의 청지기직을 동시에 보여 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궁극적인 소유자이시며,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과 자원을 맡아서 사용하고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그들이 정복한 땅은 야곱의 열두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되었다. 그러나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들처럼 일정한 지역을 토지 기업으로 분배받지 않았다. 반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하나의 지파로 인정되어 토지를 분배받았기 때문에, 레위 지파를 제외하면서도 토지를 분배받은 지파의 수는 열둘이 되었다.

레위인들은 다른 지파들처럼 넓은 지역의 토지를 기업으로 받는 대신,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 가운데서 거주할 성읍과 그 주변의 목초지를 받았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에게 모두 마흔여덟 개의 성읍을 주도록 명령하셨으며, 그 가운데 여섯 개의 성읍은 도피성으로 지정되었다(민 35:1–8; 수 21장). 따라서 레위인들이 받은 성읍은 일반 성읍 마흔두 개와 별도로 도피성 여섯 개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모두 마흔여덟 개의 성읍 가운데 여섯 개가 도피성으로 지정된 것이었다.

레위 지파가 다른 지파들처럼 토지를 기업으로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십일조 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레위인들은 성막과 후에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이 드리는 십일조를 그들의 생활을 위한 몫으로 주셨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단순히 하나님께 드리는 종교적인 헌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계 안에서 특별한 직무를 담당하는 레위인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경제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이 성막과 후에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념하도록 하셨다. 다른 지파들처럼 넓은 토지를 기업으로 받아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는 대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이 드리는 십일조를 통하여 레위인들의 생활이 유지되도록 제도를 마련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와 같은 여러 제사를 드렸다. 이러한 제물들은 각각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과 규례에 따라 드려졌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제사장들에게 몫으로 주어졌다. 이와 구별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십일조는 성막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의 생활을 지원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어졌다. 하나님은 민수기 18장 21절에서 레위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십일조를 기업으로 주셨음을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는 다른 지파들이 받은 토지 기업을 대신하는 경제적 기업의 역할을 하였다. 레위인들은 회막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섬기는 일을 담당하였고, 다른 지파들은 자신들이 얻은 소득의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그들의 생활을 지원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가계 안에서 각 지파는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하면서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그러나 십일조를 받은 레위인들도 자신들이 받은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 가운데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 하나님은 민수기 18장 28절에서 레위인들에게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로 돌리되”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드리면, 레위인들도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 가운데 다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려 제사장 아론에게 돌렸다. 이는 레위인들 역시 자신들이 받은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고, 그 가운데 일부를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렸음을 보여 준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소득에서 십일조를 구별하여 레위인들에게 주었고, 레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 가운데 다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제사장인 아론의 자손들에게 주었다. 이를 흔히 “십일조의 십일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민수기 18장 26절에서 레위인들에게 “너희가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십일조 중에서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몫은 제사장 아론에게 돌리도록 하셨다(민 18:28). 따라서 십일조의 분배 구조는 이스라엘 백성에서 레위인들에게, 그리고 레위인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분의 일은 다시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에게 전달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민수기 18장에는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레위인들에게서 받은 이 몫 가운데 다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드려야 한다는 별도의 규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사장들은 레위인들이 구별하여 드린 “십일조의 십일조”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의 십일조 제도에는 가난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기능도 있었다. 매 삼 년 끝에는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따로 저축하여 성읍 안에 두도록 하였다. 그러면 자기들과 같이 토지의 기업이나 분깃을 받지 못한 레위인뿐만 아니라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할 수 있었다(신 14:28–29; 26:12).

십일조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표현인 동시에 하나님의 가계 안에서 경제적인 자원을 분배하는 역할도 하였다. 십일조를 통하여 성막과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활을 지원하였으며, 동시에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와 같이 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의 필요도 채워 주었다. 이러한 점에서 십일조 제도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신앙적인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경제적·사회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모세는 신명기 14장 22–2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토지에서 얻은 소산의 십일조를 구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져가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소산을 함께 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웠다. 따라서 신명기 14장에 나타난 십일조는 단순히 자신의 소득 가운데 십분의 일을 포기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산 가운데 십분의 일을 구별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먹고 누리면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였다.

이러한 십일조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이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우도록 하는 것이었다(신 14:23). 다시 말하면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모든 소유와 소득의 궁극적인 근원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누리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신앙적·경제적 훈련이었다.  

십일조의 목적과 연관하여 신명기 14장 23절 말씀의 영어성경 번역들을 인용하자면,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기를 배우게 하려 함이라.”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그렇게 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공경하기를 배우도록 하라.” (The Good News Translation, GNT)

“십일조의 목적은 여러분의 삶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다.” (The Living Bible, TLB)

TLB가 그 의미를 적절하게 번역한 것처럼, 십일조의 목적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기억하게 하는 데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십분의 구를 우리의 필요를 위하여 사용하고 관리하도록 맡겨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한다. 십일조는 단순히 우리가 가진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십분의 십 모두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신앙의 표현이다.

모세는 신명기 14장 28–29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삼 년마다 그해 소산의 십일조를 성읍에 저축하여 레위인과 거류민, 고아와 과부를 돌보도록 명하며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말한다(신 14:28–29; 또한 신 26:12–14 참조).

매 삼 년 끝에 구별한 이 십일조는 토지의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뿐만 아니라,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와 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십일조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경제적 기능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십일조의 또 다른 목적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기억하고 그들의 필요를 돌보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재물은 오직 우리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웃과 나누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일조는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기억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기억하고 돌보도록 가르치는 하나님의 경제적 제도이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에 왕정이 세워진 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레위인들을 위하여 드리는 십일조와는 별도로 왕에게도 경제적인 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나라들처럼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요구하자,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왕이 그들에게 부과하게 될 경제적인 부담을 경고하셨다. 사무엘상 8장 15–1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 너희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삼상 8:15–17).

여기에서 왕이 거두는 “십일조”는 레위인들의 생활을 지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는 성격이 달랐다. 그것은 왕과 그의 관리들과 왕정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백성에게 부과되는 일종의 세금 또는 조세와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왕정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뿐만 아니라 왕정의 운영을 위하여 자신들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과 양 떼 가운데 일부를 왕에게 내야 하는 추가적인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무엘상 8장 15–17절은 왕에게 십분의 일을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새로운 십일조의 규정이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인간 왕이 백성의 재산과 소득을 거두어 감으로써 그들에게 무거운 경제적 부담을 줄 수 있음을 경고하신 말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본문에 나타난 왕의 십분의 일은 종교적인 십일조라기보다 왕정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조세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역대하 31장 5–6절은 히스기야 왕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첫 열매와 십일조를 풍성하게 드린 일을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첫 열매들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유다 여러 성읍에 사는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왔고 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왔으며 그것을 쌓아 여러 더미를 이루었는데”라고 기록한다(대하 31:5–6; 또한 대하 31:12 참조). 이 말씀은 히스기야 왕의 종교개혁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밭의 소산뿐만 아니라 소와 양의 십일조도 풍성하게 가져왔음을 보여 준다. 이렇게 거두어진 십일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여호와의 율법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대하 31:4).

앞에서 살펴본 십일조들을 각각 별도의 십일조로 이해하여 단순하게 계산한다면, 왕정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레위인들을 위한 십일조 10퍼센트를 드리고, 매 삼 년 끝에는 레위인과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를 위한 십일조 10퍼센트를 별도로 구별하였다고 볼 수 있다. 후자를 연평균으로 환산하면 약 3.3퍼센트가 되므로, 전체적인 부담은 연평균 약 13.3퍼센트에 해당한다.

왕정이 시작된 후에는 여기에 왕이 곡식과 포도원 소산 및 양 떼에서 거두어 가는 십분의 일이 추가될 수 있었다(삼상 8:15–17). 이것을 10퍼센트의 조세로 계산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적인 부담은 연평균 약 23.3퍼센트에 해당한다고 계산할 수 있다. 즉 레위인들을 위한 십일조 10퍼센트, 왕이 거두어 가는 약 10퍼센트, 그리고 매 삼 년 끝에 가난한 레위인과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구별한 십일조를 연평균으로 환산한 약 3.3퍼센트이다. 그러나 이러한 13.3퍼센트와 23.3퍼센트라는 수치는 성경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시적으로 제시한 연간 세율은 아니다. 이것은 각각의 십일조를 서로 별도의 의무로 이해하고, 매 삼 년의 십일조를 연평균으로 환산하며, 사무엘상 8장의 왕이 거두는 십분의 일을 매년 부과되는 조세로 이해할 경우에 얻어지는 계산이다.

십일조 제도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토지의 소산에서 십일조를 구별하여 레위인들에게 주었으며, 레위인들은 이를 통하여 성전에서 맡은 직무를 수행하며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받았다. 느헤미야 10장 37–38절은 이러한 제도가 다시 시행된 것을 “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여러 방에 두고 또 우리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이 레위 사람들이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산물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한 사람이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곳간의 여러 방에 두되”라고 기록한다(느 10:37–38).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모세의 율법에서 규정된 십일조의 기본적인 분배 구조는 포로 이후에도 이어졌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소산에서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주었고, 레위인들은 받은 십일조 가운데 다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성전 곳간에 가져갔다. 이는 민수기 18장 21절과 26–28절에서 규정된 십일조 제도가 포로 이후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도 계속 시행되었음을 보여 준다.

십일조는 이처럼 특정한 시대에만 일시적으로 시행된 제도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성막과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지원하고 하나님의 가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경제적 제도로 기능하였다.

온전한 십일조

말라기 3장 8–10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와 봉헌물을 제대로 드리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행위로 지적하며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한다(말 3:8–10).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십일조가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십일조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표현이다. 우리가 무엇을 어떠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가는 하나님을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며 우선에 두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따라서 “온전한 십일조”는 단순히 정확한 액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믿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관리하고 그 가운데 일부를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 삶의 첫째 자리에 모시는 신앙의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일조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감사, 그리고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함께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약성경의 십일조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는 철저히 드리면서도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한 것을 책망하시며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신다(마 23:23; 또한 눅 11:42 참조).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호세아 6장 6절에서 하나님께서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신 것과 그 기본적인 정신에서 서로 통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명령하신 제사와 번제를 더 이상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십일조 자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함께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셨다. 결국 두 말씀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신앙의 우선순위이다. 외적인 종교 행위를 형식적으로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 믿음을 정의와 긍휼의 삶으로 나타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 23장 23절에서 예수님은 십일조 자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시 율법 아래에 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함께 율법의 더 중요한 요구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같은 작은 농산물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십일조를 계산하면서도 정작 율법의 더 중요한 정신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단순히 십일조의 액수나 형식만이 아니라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의 신앙과 그 십일조에 담긴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소득 가운데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가? 그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을 우리에게 맡겨 사용하며 살아가도록 허락하신 것에 감사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를 드리면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저버린다면 십일조가 나타내야 할 하나님 중심의 삶과 그 정신을 온전히 실천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신 십일조, 특히 레위인들의 생활을 위하여 구별하도록 하신 십일조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일종의 조세로 이해하기도 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은 단순히 개인적인 신앙의 대상만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셨으며, 십일조는 레위인들과 제사 제도를 유지하고 공동체 안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경제적 기능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일조를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시행된 일종의 종교적·사회적 조세로 이해하기도 한다.

예수님과 세금

세금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 반 세겔에 해당하는 두 드라크마의 성전세를 거두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예수님도 성전세를 내시는지를 물었다(마 17:24; 출 30:13–16 참조).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세를 낼 의무에서 자유로우심을 말씀하시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세금을 내도록 하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고 말씀하셨다(마 17:2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공동체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성전세를 납부하셨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성전세를 낼 의무가 없음을 암시하셨다. 세상의 왕들이 자기 자녀들에게서 세금을 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본래 아버지의 성전을 위하여 세금을 내야 할 의무가 없으셨다는 것이다(마 17:25–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불필요한 오해나 걸림돌을 만들지 않기 위하여 성전세를 내셨으며, 베드로의 몫까지 함께 지불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세금이나 당시의 제도를 단순히 거부하지 않으셨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마태복음 17장의 두 드라크마는 로마 정부에 내는 세속적인 세금이 아니라 성전의 운영과 관련된 종교적인 부담금이었다. 따라서 이 본문만으로 예수님의 세속 정부와 세금에 대한 전체적인 태도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세속 정부에 내는 세금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마 22:21; 막 12:17; 눅 20:25). 예수님은 세속 정부의 정당한 요구를 무조건 거부하도록 가르치지 않으셨다. 동시에 인간 정부에 대한 의무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궁극적으로 우선한다는 사실도 분명히 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시의 세금과 사회적 의무를 무조건 거부하지 않으셨지만, 그것들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해하셨다고 할 수 있다.

세금에 관한 또 다른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하였다(마 22:15–22; 막 12:13–17; 눅 20:20–26). 그들은 마태복음 22장 17절에서 예수님에게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라고 물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 한다고 대답하시면 로마의 지배와 세금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의 반발을 살 수 있었고, 반대로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하시면 로마의 통치에 저항하도록 선동한다는 정치적인 고발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의도를 아시고 지혜롭게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세금으로 내는 돈을 자신에게 보여 달라고 하신 후, 그 동전에 새겨진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인지를 물으셨다. 그들이 “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마 22:21).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도 세속 정부에 대하여 마땅히 이행해야 할 경제적·사회적 의무가 있음을 인정하셨다. 따라서 세금을 납부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인간 정부의 권위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세속 정부에 속한 정당한 의무를 이행해야 하지만, 궁극적인 충성과 순종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세금

바울은 로마서 13장 6–7절에서 세금 납부를 세상의 통치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연결하여 “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말한다(롬 13:6–7).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Nero)였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통치 권세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라고 가르친다. 특히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라”고 권면함으로써 세금 납부가 그리스도인이 사회 안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 가운데 하나임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법적으로 부과된 세금을 정직하게 납부해야 하며, 탈세나 부정한 방법으로 세금 납부의 의무를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합법적인 절세(tax avoidance)와 불법적인 탈세(tax evasion)는 구별되어야 한다. 납세자가 세법이 허용하는 각종 공제, 면제, 세액공제 및 감면 규정을 검토하여 자신의 세금 부담을 합법적으로 줄이는 것은 정당한 경제적 의사결정이다.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세금을 절약하는 것 자체는 납세의 의무를 회피하는 행위라고 할 수 없다. 반면 탈세는 소득을 숨기거나 허위로 신고하는 등의 방법으로 법에 따라 납부해야 할 세금을 불법적으로 회피하는 행위이다. 이는 법을 위반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라”는 바울의 가르침에도 어긋난다(롬 13:7).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세금 부담을 줄일 수는 있지만, 불법적인 방법으로 납부해야 할 세금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십일조와 세금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서 받은 십일조를 사용하여 레위인들의 생활을 지원하셨다. 레위인들은 다른 지파들처럼 토지의 기업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성막과 후에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온전히 바칠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십일조를 그들의 생활을 위하여 사용하게 하셨다. 이러한 점에서 구약의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종교적인 헌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레위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일종의 조세와 같은 경제적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소산 가운데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렸으며, 이것은 정기적으로 레위인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민 18:21). 또한 매 삼 년 끝에는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성읍에 저축하여 토지의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가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도록 하였다(신 14:28–29; 26:12). 이 십일조를 정기적으로 드리는 레위인들의 십일조와 구별되는 별도의 십일조로 이해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소득 가운데 추가적인 몫을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하여 사용한 셈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나라들과 같이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요구하여 왕정이 세워진 후에는 왕에게도 추가적인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사무엘을 통하여 왕이 그들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과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삼상 8:15–17).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는 달리 왕과 그의 관리들을 비롯한 왕정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조세였다.

따라서 구약의 십일조와 왕에게 내는 조세는 하나님의 백성이 얻은 경제적 자원이 개인만을 위하여 사용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 자원은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인들을 지원하고,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와 같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며, 왕정이 세워진 후에는 국가의 통치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소득 가운데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린다. 교회는 이러한 십일조와 헌금을 목회자의 생활을 지원하는 데 사용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여러 사역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구제 활동, 지역사회 지원, 선교사 후원 등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사용한다.

교회가 목회자의 생활을 충분히 지원할 수 있다면, 목회자는 생계를 위하여 별도의 직업을 갖기보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며 교회를 섬기는 사역에 전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는 구약시대의 레위인들과 경제적 기능 면에서 어느 정도 유사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구약시대에 레위인들이 토지의 기업을 받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십일조를 통하여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성막과 성전에서 섬기는 일에 전념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교회는 성도들이 드리는 헌금을 통하여 목회자의 생활을 지원함으로써 그들이 교회의 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다.

신약성경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그 사역을 통하여 생활에 필요한 지원을 받는 원리를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은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말한다(고전 9:14). 또한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권면한다(갈 6:6). 따라서 교회가 목회자의 생활을 지원하여 그가 말씀과 목회 사역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은 구약의 레위인 제도와 일정한 연속성을 보여 주면서도 신약성경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원리이다.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소득이 있을 때 미국의 경우, 연방정부, 주정부 및 지방정부에 소득과 관련된 세금을 납부하며,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할 때에도 판매세를 비롯한 여러 세금을 부담한다. 이처럼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의 세금을 정부에 납부하고, 정부는 이렇게 거두어들인 조세를 정부의 운영과 다양한 공공서비스를 위하여 사용한다.

반면 소득이 없거나 매우 적은 사람들은 정부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지원에는 음(-)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와 같은 제도, 현금이전(cash transfers), 그리고 현물급여(in-kind transfers)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정부의 이전지출은 저소득층과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활을 지원하고 소득을 재분배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현대의 소득재분배 제도는 제도의 형태와 역사적 배경은 다르지만, 경제적 기능이라는 측면에서는 구약시대에 매 삼 년 끝에 시행된 십일조와 어느 정도 유사한 점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성읍에 저축하여 토지의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가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고 명령하셨다(신 14:28–29; 26:12).

따라서 구약의 삼 년째 십일조와 현대 정부의 이전지출은 동일한 제도는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원의 일부를 거두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소득재분배의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비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구약의 십일조 제도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취약한 이웃을 돌보는 사회적 안전망(social safety net)의 기능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소득이 있으면 자신의 소득 수준과 적용되는 세율에 따라 연방소득세(federal income tax)와, 주에 따라서는 주소득세(state income tax)를 납부한다. 미국의 소득세는 기본적으로 누진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득 수준에 따라 적용되는 세율이 달라진다. 또한 사람들은 소득세뿐만 아니라 사회보장세와 메디케어세와 같은 급여세(payroll taxes)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세금을 부담한다. 따라서 개인이 실제로 부담하는 전체 조세의 규모는 소득 수준, 거주하는 주, 각종 공제와 세액공제 및 개인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조세는 미국 연방정부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다. 연방정부가 거두어들이는 개인소득세, 급여세, 법인소득세 및 기타 조세 수입은 정부의 다양한 활동을 위한 재원으로 사용된다. 여기에는 사회보장(Social Security), 국방, 메디케어(Medicare)와 메디케이드(Medicaid)를 비롯한 주요 보건의료 프로그램, 실업급여와 저소득층에 대한 식품 및 주거 지원과 같은 사회안전망 프로그램, 국가채무에 대한 이자 지급,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정부 프로그램이 포함된다. 따라서 현대 정부가 거두는 조세는 정부 자체의 운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방과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 노인과 저소득층 및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지원하며, 사회 전체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사용된다.

오늘날의 조세는 과거보다 훨씬 다양한 목적과 정부 활동을 위하여 사용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세금을 부담한다. 미국의 납세자들은 연방소득세, 주에 따라 부과되는 주소득세, 사회보장세(Social Security tax), 메디케어세(Medicare tax), 그리고 상품과 서비스를 구입할 때 부과되는 판매세(sales tax) 등을 부담한다. 이러한 여러 세금을 모두 합하면 많은 사람들의 전체적인 조세부담은 소득의 10퍼센트를 넘을 수 있으며, 소득 수준과 거주 지역 및 소비 형태 등에 따라서는 전체 조세부담이 소득의 30–40퍼센트에 이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십일조는 기본적으로 일정한 비율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비례세(proportional tax)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소산의 십분의 일을 레위인들을 위하여 구별하였으며(민 18:21), 왕정 아래에서는 왕도 곡식과 포도원 소산 및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갈 수 있었다(삼상 8:15–17). 이러한 십분의 일이라는 일정한 비율만을 놓고 본다면, 현대 경제학의 개념으로 비례적인 부담과 비교할 수 있다.

반면 오늘날 미국의 연방 개인소득세(federal individual income tax)는 누진세(progressive tax) 구조를 가지고 있다.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납세자는 더 높은 한계세율 구간(marginal income tax bracket)에 들어가며, 높은 세율은 전체 소득이 아니라 해당 세율 구간에 속하는 추가적인 과세소득에 적용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소득이 높은 사람일수록 연방 개인소득세에서 더 높은 한계세율을 적용받는다. 그러나 미국의 모든 세금이 누진적인 것은 아니다. 사회보장세와 메디케어세 같은 급여세와 주 및 지방정부의 판매세 등은 연방 개인소득세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부과된다. 따라서 구약의 십일조 제도와 오늘날의 미국 조세제도를 비교할 때에는, 구약의 십일조는 일정한 비율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비례세와 유사한 반면, 현대 미국의 연방 개인소득세는 대표적인 누진세 제도라고 할 것이다.

이상에서 논의한 십일조와 세금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과 사회에 대한 경제적 책임을 함께 생각하게 한다. 먼저 십일조는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십일조나 다른 행위의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 자체가 구원을 보장하거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이 곧 구원을 잃는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십일조의 더 중요한 의미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데 있다.

구약에서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레위인과 제사장을 지원하고,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와 같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데 사용되었다. 예수님도 십일조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셨지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라는 더 중요한 가치를 소홀히 하면서 형식적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태도를 책망하셨다(마 23:23).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정확하게 계산하여 드렸는가 하는 문제를 넘어,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감사하며 교회와 복음 사역을 지원하고 어려운 이웃과 나누는 청지기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금은 십일조와 성격과 목적이 다르지만,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감당해야 할 경제적 책임이다.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고(마 22:21), 바울도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라”고 권면하였다(롬 13:7).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법적으로 부과된 세금을 정직하게 납부해야 한다. 동시에 정부도 국민이 납부한 세금을 맡겨진 공공의 자원으로 인식하고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공동체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국민의 삶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

결국 십일조와 세금은 모두 우리가 재물을 어떻게 바라보고 사용하는가에 관한 중요한 경제윤리적 문제이다. 십일조는 구원을 얻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감사의 표현이며, 세금은 우리가 속한 사회에 대한 책임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모든 소유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드릴 것을 감사함으로 드리고, 국가와 사회에 대한 경제적 의무도 정직하게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우리의 경제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청지기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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