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September 11, 2026

책: 성경에서 경제를 배운다

 

                                                                (2027년 출간 예정)

  

 

저자 소개 




저자는 목회자이자 교수이다. 미국에서 한인교회를 목회하면서 교회와 신학교에서 성경과 성서신학을 가르쳤으며, 여러 기독교 대학교에서 경제학, 금융학, 성경신학을 가르쳐 왔다. 한국의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버지니아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석사학위를, 드루대학교(Drew University)에서 신약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저서로는 『너희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로마서 강해』(1999),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에베소서·빌립보서 강해』(1999),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요나서 강해』(2000),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고린도전서 강해』(2000), 『약할 때 곧 강함이라: 고린도후서 강해』(2001), 『다른 복음은 없나니: 갈라디아서 강해』(2005), 『바울의 생애, 서신들과 신학』(2013), Economics in the Bible(2025), Paul’s Life, Epistles, and Theology(2025) 등이 있다.

 


『성경에서 경제를 배운다』 소개

『성경에서 경제를 배운다』는성경에서 경제에 관하여 무엇을 배울 있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성경은 현대적인 의미의 경제학 교과서는 아니지만, 인간이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을 어떻게 관리하고, 무엇을 선택하며, 다른 사람들과 어떠한 경제적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경제학이 인간과 여러 경제주체들의 의사결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성경 역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의사결정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묻는다.

책의 중심 개념은 신약성경의 오이코노미아(οκονομία, oikonomia)이다. 말은 본래 가계 또는 집안을 관리하는 것을 의미하며 오늘날경제(economy)’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저자는 개념을 바탕으로 성경의 경제를 하나님의 가계와 인간의 가계를 관리하는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모든 것의 궁극적인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재산과 소득, 노동과 재능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것이 책의 기본적인 관점이다.

책은 이러한 성경의 경제를 가지 관점에서 살펴본다. 먼저하나님의 경제에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계를 다스리고 관리하시는 활동을 거시경제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이어 개인과 가계의 경제에서는 노동, 소득, 소비, 저축, 투자, 재산과 부채 일상적인 경제적 의사결정을 미시경제학적 관점에서 다룬다. ‘복음 전도의 경제에서는 바울과 그리스도인들에게 위탁된 복음 전도를 하나님의 가계를 다른 민족과 사람들에게까지 확장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이를 국제경제학적 관점에서 살펴본다. 마지막으로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에서는 개인과 가정, 교회와 사회, 기업과 국가의 경제활동에서 정직과 공정, 겸손과 검소함, 근면과 신실함, 나눔과 이웃 사랑이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를 논의한다.

따라서 『성경에서 경제를 배운다』는 단순히 성경 속에서 현대 경제학의 개념을 찾아내는 책이 아니다. 경제의 궁극적인 주인이 누구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누구의 것이고,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일하고 소유하고 소비하며 나누어야 하는가를 성경과 경제학의 관점에서 함께 묻는 책이다. 우리의 경제생활 역시 신앙생활의 부분이며, 모든 경제적 의사결정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경제에 참여하는 삶이라는 것이 책이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중심 메시지이다.

 


 

목차

 

머리말 (PREFACE)

 

시작하는 장 (PROLOGUE)           

1        성경에서 경제는 무엇인가? (What is the Economy in the Bible?)

 

1    하나님의 경제 (THE ECONOMY OF GOD)

2        하나님의 경제란 무엇인가? (What is the Economy of God?)

3        양식 (Food)

4        토지 (Land)

5        노동 (Labor)

6        십일조와 세금 (Tithes and Taxes)

7        대출, 이자와 부채 (Loans, Interest, and Debts)

8        , 빈곤과 소득 불평등 (Wealth, Poverty, and Income Inequality)

9        공산주의와 공생주의 (Communism versus Commonism)

제10     평균의 경제학 (Economics of Equality)

 

2    가계의 경제 (THE ECONOMY OF A HOUSEHOLD)

11      가계의 경제란 무엇인가? (What is the Economy of a Household?)

12      가계의 청지기 (A Steward of a Household)

13      기업가 정신과 자원의 사용 (Entrepreneurship and the Use of Resources)

14      효율성과 형평성 (Efficiency versus Equity)

15      시장 (Markets)

16      불확실성의 경제학 (Economics under Uncertainty)

17      환경 경제학 (Environmental Economics)

       

3    복음 전도의 경제 (THE ECONOMY OF EVANGELISM)

18      복음 전도의 경제란 무엇인가? (What is the Economy of Evangelism?)

19      복음 전도에서의 교회의 역할 (Role of the Church in Evangelism)

20      하나님의 가계의 확장 (Expansion of God’s Household)

       

4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 (CHRISTIAN ECONOMIC ETHICS)

21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란 무엇인가? (What is Christian Economic Ethics?)

22      다양한 관계에서의 경제윤리 (Economic Ethics in Different Relations)

23      자본주의에서의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 (Christian Economic Ethics in

                   Capitalism)

       

마치는 장      

24       실낙원(失樂園)의 회복 (Restoration of the Lost Paradise)

 

부록 (APPENDIX)

       하나님의 이름과 특성 (Names/Characteristics of God)

 

참고문헌 (BIBLIOGRAPHY)

 

 

 

머리말 

 

많은 사람은 경제학과 성경이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그 관계가 매우 적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내가 경제학과 성서학을 공부했다고 말하면, 서로 상당히 다른 두 분야를 왜 함께 공부했는지 궁금해한다. 그리고 내가 이전에 공부했던 경제학을 그만두고 목회자가 되기 위해 성서학을 공부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성경이 경제에 관하여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경제학을 경제 주체들이 일상생활에서 내리는 의사결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경제 주체란 개인, 기업, 시장, 정부 등을 말한다.

미시경제학은 개인이 자신과 가계의 만족, 곧 효용(utility)을 최대한 높이기 위하여 어떤 의사결정을 하는지, 그리고 기업이 이윤을 최대한 높이기 위하여 어떤 의사결정을 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개인과 가계는 한정된 소득과 자원을 가지고 무엇을 얼마나 소비하고 저축할 것인지 결정하며, 기업은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고 어떤 가격에 판매할 것인지 등을 결정한다.

거시경제학은 국가 경제 전체의 관점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적 의사결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정부는 고용과 실업, 인플레이션, 경기변동, 경제성장과 같은 여러 경제 상황에 직면하여 어떤 정책을 선택하고 시행할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따라서 경제학은 개인과 가계에서부터 기업과 시장, 정부와 국가 전체에 이르기까지 여러 경제 주체가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미아(영어로는 economy)는 집(=오이코스)과 관리 또는 경영(=노미아)의 복합어이다. , 문자적 의미는 가계의 경영 또는 관리이다. 신약성경에서 오이코노미아는 세 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첫째는 가계 혹은 가사의 경영, 다른 사람의 소유에 대한 경영, 관리 및 감독또는 청지기의 직무를 의미한다 (16:1-4). , 하나님께로부터 달란트를 부여받은 각 청지기의 달란트의 경영, 가계의 경영을 의미한다. 각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청지기(=오이코노모스: 가계 경영을 맡은 자)임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소유는 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고, 따라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에 따라 나눔의 사역을 감당할 것이다.

둘째로, 오이코노미아는 복음 증거의 사명혹은 복음 증거를 위한 청지기의 직분을 의미한다 (고전 9:17). 하나님께로부터 복음 증거란 최고의 사명을 맡은 크리스천이 개인으로 또는 공동으로 이루어나가야 할 일이다.

셋째로, 오이코노미아는 인간의 구원을 위해 예비된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경륜(經綸, dispensation, plan)’ 이란 뜻이다 (1:9-10). , ‘하나님의 경제 또는 경제계획이다. ‘하나님의 경제계획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통한 인간구원이다. 이 시대 상황 가운데 존재하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교회의 경제계획도 인간 구원을 목표로 함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때 영혼의 구원이 물론 일차적인 목표이지만, 육체적 경제적 빈곤으로 신음하는 이웃을 구원함도 교회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신약성경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경제를 그의 구원계획에 한정하고 있지만,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의 경제는 그의 가계에 속한 그의 백성들을 위한 다스리심과 의사결정의 모든 행위들을 포함한다. ‘하나님의 경제는 창세기 128절에서 보는 바 대로, 그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지으신 사람들에 대한 축복으로부터 시작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나는 성경을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경제학 교과서라고 본다. 성경은 평균의 경제원리를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9절 이하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9-15)고 함으로써 평균의 경제원리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평균의 경제원리는 이미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공급하신 하나님의 뜻에서 찾을 수 있다(16:18).

빈들에서 5천 명을 먹이신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은 단순한 이적이 아니라, 교회가 감당해야 할 나눔의 사역을 보여주신 예이다. ‘평균의 경제원리, 바울의 예에서도 그러했듯이, 나눔의 사역을 통해서 실천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나눔의 경제사역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하기를 원하신다. 마태복음 141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고 명하셨고, 19절에 보면, “…… (예수님이)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매 제자들이 무리에게 주니라고 함으로써 제자들을 나눔의 사역에 동참시키셨다. ‘평균의 경제원리는 초대교회에서도 적용되었다. 믿는 사람들이 물건을 서로 나누고 통용할 때 그들 가운데 핍절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행전 2:44-47, 4:32-35).   

경제학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나는 경제학에 대한 나의 지식과 성경에 대한 이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가르침을 서로 연결하고자 한다. 경제학과 성경은 서로 동떨어진 분야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라는 공통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건전한하나님의 경제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 원리들을 일상생활의 경제적 선택과 의사결정에 적용할 수 있는 길을 계속해서 찾아가고자 한다. 이 책을 통하여 독자들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제 원리를 이해하고, 그 원리에 따라 자신의 가계와 경제생활을 더욱 지혜롭게 관리하며 살아가는 데 도움을 얻기를 바란다. 이 책에서는 별도로 다른 성경 번역본을 명시하지 않는 한 개역개정(改易改訂)을 사용한다.



시작하는 장

 

1 성경에서 경제는 무엇인가?

경제의 일반적 의미

경제(economy)’란 일반적으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 및/또는 소비, 고용 또는 실업, 인플레이션, 경제성장, 생활수준 등과 관련된 한 국가의 상태를 의미한다. 경제는 또한가계, 기업, 정부와 같은 다양한 경제 주체들이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 소비, 분배 또는 거래하는 활동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또는특히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소비의 측면에서 본 국가나 지역의 부와 자원,” 혹은가용 자원의 신중한 관리로 정의될 수도 있다. 따라서 가계경제란 한 가계의 부()를 의미하거나, 가계가 이용 가능한 희소한 자원을 신중하게 관리하는 것을 의미한다. 국가경제란 생산과 소비의 측면에서, 또는 인플레이션, 실업, 국내총생산(GDP), 경제성장과 관련하여 본 한 국가의 부와 자원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경제학 교과서에서 이해하는경제는 가계나 국가의 부와 자원의 상태 또는 상황을 의미하는 경우가 더 많다.

경제의 어원적 의미

경제(經濟)라는 단어는경세제민’(經世濟民), ‘경국제세’(經國濟世), 또는경국제민’(經國濟民)의 약칭이다. 이 용어는 중국 고전의 오경(五經) 가운데 하나인 『서경』(書經)이나 『장자』(莊子)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의미는 정부가 국가의 전반적인 업무와 문제들(정치·경제·사회적 영역을 포함)을 잘 관리하고 통치함으로써 백성을 구제하고 그들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번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를 지닌 경제(經濟)라는 단어는 중국, 한국,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널리 사용되어 왔으며, 경제 영역뿐만 아니라 정치와 행정의 영역까지도 포함한다. , 이는 정부가 국가를 다스리고 국민을 번영하게 하기 위해 수행하는 전반적인 활동, 계획, 또는 통치 방식을 의미한다.

헬라어오이코노미아’(οκονομία, oikonomia)는 영어 ‘economy’에 해당하는 말이다. ‘오이코노미아오이코스’(οκος, oikos, ·가정)’노미아’(νομία, nomia, 관리)가 결합된 합성어로, 본래가정이나 가계를 관리하는 일을 의미한다. 따라서 경제(economy)라는 개념은 원래 가정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또한 오이코노모스’(οκονόμος, oikonomos)는 가정이나 가계를 책임지고 관리하는 사람, 곧 청지기 또는 가정 관리자를 가리킨다.

오이코노미아의 신약성경에서의 사례들

오이코노미아(oikonomia, οκονομία)’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 총 아홉 번 등장한다. 누가복음에 세 번(16:2, 3, 4), 고린도전서에 한 번(9:17), 에베소서에 세 번(1:9; 3:2, 9), 골로새서에 한 번(1:25), 그리고 디모데전서에 한 번(1:4) 사용되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 16 2–4절에서주인이 그(청지기)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오이코노미아)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청지기의) 직분(오이코노미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오이코노미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였더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은 에베소서 1 9–10절에서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오이코노미아)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한다. 에베소서 3 2절과 9절에서는2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하나님의 그 은혜경륜(오이코노미아)을 너희가 들었을 터이라.9 영원부터 만물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추어졌던 비밀의 경륜(오이코노미아)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말씀한다. 또한 골로새서 1 25절에서 바울은 내가 교회의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직분(오이코노미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고, 디모데전서 1 4절에서는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오이코노미아)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라고 말씀한다.

오이코노미아의 신약성경에서의 의미들

첫째, 신약성경에서오이코노미아청지기직(stewardship) 또는 가계를 관리하는 직분을 의미한다( 16:1–4).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한 사람씩 불러 그들의 빚을 장부에서 줄여 주었다. 후에 주인은 불의한 청지기가 한 일을 알고 그의 영리함을 칭찬하였다( 16:8). 그러나 이것은 불의한 청지기가 옳은 일을 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찾아냈다는 의미이다.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의 청지기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하는 일은 하나님을 위한 청지기직이다.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우리는 정직하고 신실해야 한다.

둘째, ‘오이코노미아는 복음을 전파하거나 선포하는 사명 또는 경륜(dispensation)을 의미한다(고전 9:17; 3:2; 1:25). 바울은 고린도전서 9 17–18절에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 또는 위탁받은 직분을오이코노미아라고 부른다. 또한 에베소서 3 2절에서오이코노미아는 에베소 사람들을 포함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 자신의 사명, 이방인들을 위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청지기직 또는 위탁받은 직분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자신의 사명 또는 청지기직하나님의 은혜와 선물로 받아들였다. 그는 골로새서 1 25절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자신의 사도직에 관하여 말하면서, 그것을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직분 또는 경륜(the divine office or commission)이라고 했다. 사도(apostle)라는 말은보냄을 받은 사람을 의미하며,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언급할 때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자신의 의무와 사명을 상기한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자신의 사명 또는 위탁받은 직분을 규정하면서오이코노미아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그는 복음을 전파하는 자신의 사명이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셋째,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오이코노미아는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plan) 또는 경륜(dispensation)을 의미한다( 1:9–10; 3:2, 9; 딤전 1:4). 바울은 에베소서 1 9–10절과 3 9절에서오이코노미아를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하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또는 경륜이라고 말한다. 이 계획은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으나, 정한 때가 이르자 이제 계시되었다. 에베소서 3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은혜의 경륜은 바울이 선포하도록 위탁받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구원 계획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바울은 디모데전서 1 3–4절에서도오이코노미아를 하나님과 관련하여 사용하며, 이는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훈련(divine training), 곧 하나님의 계획, 경륜 또는 질서를 의미한다. 바울은 하나님의오이코노미아를 하나님의 정한 때에 그의 백성, 곧 믿음의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 또는 계획(혹은 경륜)으로 해석하거나 이해하고 있다.

경제학의 일반적 정의

경제(economy)와 마찬가지로 경제학(economics)도 여러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경제학은가계, 기업, 시장이나 산업, 정부, 그리고 국가 전체와 같은 여러 경제 주체들이 어떻게 경제활동을 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사람들의 욕구는 무한하지만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가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여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하고 나누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경제학은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사람들이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우리가 경제학을 공부할 때에는 먼저 가계의 경제를 다룬다. 가계가 소득을 어떻게 사용하고 무엇을 소비하는지를 분석하여, 한정된 소득과 자원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지를 연구한다. 또한 기업의 경제를 연구한다. 기업이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고 어떻게 비용을 관리하는지를 분석하여, 기업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이윤을 높일 수 있는지를 알아본다. 그리고 국가 전체의 경제도 연구한다. 총수요와 총공급, 경제성장, 정부의 경제정책 등을 분석하여, 정부가 인플레이션과 실업 같은 경제 문제에 어떻게 대처하고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는지를 연구한다.

결국 경제학은 가계에서부터 기업과 정부, 그리고 국가 전체에 이르기까지, 한정된 자원을 어떻게 현명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원하는 목표를 이룰 것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학은 일반적으로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으로 나뉜다. 미시경제학(Microeconomics)은 가계와 기업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시장에서 서로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 그리고 정부가 그들의 선택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를 연구하는 분야이다. 다시 말하면, 개인이나 가계, 기업, 산업, 또는 정부의 각 부문이 어떤 경제적 결정을 내리는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거시경제학(Macroeconomics)은 국가 경제 전체를 연구하는 분야로서, 인플레이션, 실업, 경제성장과 같은 문제들을 주로 다룬다. 다시 말하면, 개별 가계나 기업이 아니라 국가 경제 전체의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적 결정과 그 결과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경제학을의사결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한다. , 가계, 기업, 시장이나 산업, 그리고 정부가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미시경제학이라면, 국가 전체의 경제와 관련하여 어떤 결정을 내리는지를 연구하는 것이 거시경제학이다.

성경 속에서의 경제학

앞서 언급한 것처럼, ‘경제를 뜻하는 헬라어 오이코노미아(οκονομία, oikonomia)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다. 첫째, 가계를 관리하는 일, 곧 관리 또는 청지기직을 의미한다. 둘째, 사도 바울에게 맡겨진 복음을 전하고 널리 알리는 사명, 위탁받은 임무, 직무 또는 직분을 의미한다. 셋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 또는 경륜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이코노미아(oikonomia)의 문자적인 뜻인가계를 관리하는 일은 이처럼 서로 다르게 번역되는 의미들을 모두 포괄할 수 있다.

바울은이방인들을 위하여 자신에게 맡겨진청지기의 직분를 수행했다( 3:2; 1:25). 다시 말하면,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널리 알림으로써(고전 9:17; 3:2; 1:25) 하나님의 가계를 관리하며, 하나님의 가계가 이방인들, 곧 다른 민족과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되도록 하는 일을 맡았다. 한편, 하나님은 때가 차면 이루실 자신의 계획, 곧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계획을 자신의 백성에게 알려 주심으로써( 1:9; 3:2, 9; 딤전 1:4) 자신의 가계를 친히 관리하신다.

성경에서 경제에 관하여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는 경제학이란 무엇인가? 신약성경에서 경제를 의미하는 오이코노미아(οκονομία, oikonomia)의 개념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성경에서의 경제학은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는 개인이 자신에게 맡겨진 가계를 관리하는 청지기직이고, 둘째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계, 곧 하나님의 나라를 다스리고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경제이며, 셋째는 바울과 모든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가계를 다른 민족과 사람들에게까지 확장하는 청지기직이다.

이러한 세 가지 차원은 현대 경제학의 여러 관점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다. 먼저 개인이 자신의 가계를 어떻게 관리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며 의사결정을 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미시경제학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계, 곧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다스리고 관리하시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하나님의 가계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거시경제학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바울과 모든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가계를 다른 민족과 사람들에게까지 확장하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하나님의 가계가 민족과 지역의 경계를 넘어 확장된다는 점에서 국제경제학적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관점에는 하나의 공통된 주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의사결정이다. 일반적으로 경제학이 개인, 가계, 기업, 정부와 같은 경제주체들의 의사결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성경에서의 경제학 역시 하나님과 인간의 가계를 둘러싼 의사결정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나께서 그의 가계 전체를 다스리시고 관리하시는 것은 거시경제학적 측면에서, 개인이 자신의 가계를 관리하기 위하여 내리는 의사결정은 미시경제학적 측면에서, 그리고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계를 다른 민족과 사람들에게까지 확장하는 것은 국제경제학적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에 한 가지 관점이 더 필요하다. 개인과 가계, 기업과 교회, 그리고 사회와 국가가 실제 경제생활에서 어떠한 원리와 기준에 따라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경제윤리학적 관점에 해당한다. 경제적 의사결정은 단순히 효용이나 이윤을 극대화하는 문제에만 머물지 않는다. 성경의 관점에서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을 어떻게 관리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까지 포함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 말하는 성경의 경제학은 오이코노미아, 곧 가계의 관리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가계와 인간의 가계에 관한 의사결정을 연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가계 전체를 다스리고 관리하는 거시경제학적 관점, 개인의 가계를 관리하는 미시경제학적 관점,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계를 다른 민족과 사람들에게까지 확장하는 국제경제학적 관점, 그리고 이 모든 경제활동에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올바른 의사결정을 추구하는 경제윤리학적 관점이 서로 연결되어 이 책의 전체적인 틀을 이룬다.

이 책의 구성과 계획

이 책의 1에서는하나님의 경제를 다룬다. 이는 거시경제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경제를 이해하고, 그와 관련된 여러 거시경제적 주제들을 다루는 것이다. 바울은 신약성경에서하나님의 경제”( οκονομία το Θεο)를 말할 때 주로 하나님의 구원 계획 또는 구원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아야 할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구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하나님의 경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나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구약성경과 복음서, 특히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선포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경제에는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여러 활동도 포함된다. 따라서 제1부에서는 하나님의 다양한 통치 활동과 가르침을 경제적인 관점에서 연구한다. 여기에는 일용할 양식, 토지, 대출, 십일조와 세금, , 가난을 비롯한 여러 거시경제적 주제들이 포함된다.

이 책의 2에서는 개인의 가계 경제를 다룬다. 이는 미시경제적 관점에서 가계의 경제를 이해하고, 그와 관련된 여러 미시경제적 주제들을 다루는 것이다. 개인의 가계는 하나님의 가계를 이루는 가장 작은 단위이다. 가계를 구성하는 각 개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가계를 관리하는 관리자이자 청지기로서, 가계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해 여러 가지 결정을 내린다. 따라서 제2부에서는 각 개인이 자신의 가계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여러 활동과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경제적 의사결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여기에는 달란트 또는 돈, 노동,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자원을 어떻게 사용하고 관리할 것인가와 같은 미시경제적 주제들이 포함된다.

이 책의 3에서는 복음 전도의 경제 또는 교회 전체의 경제를 다룬다. 복음 전도의 경제란 하나님의 경제를 여러 나라와 민족에게까지 확장하는 우리 모두의 사명을 의미한다. 이는 국제경제적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을 만난 경험을 세 차례 기록하고 있다( 9:3–19; 22:6–16; 26:9–23). 사도행전 26 15–18절에서 예수님은 바울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일어나 너의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종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26:15–18). 바울 자신은 갈라디아서 1 15–16절에서 이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에 그것을 강하게 주장하였다. 특히 그의 사도직은 유대계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의문을 받거나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사도라는 말은 헬라어 동사 아포스텔로(ποστέλλω), 보내다에서 유래한다. 이러한 말의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바울에게 사도직은 권위를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의무이자 사명이었다. 그 사명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바울에게 맡겨진 경제, 곧 사명과 위탁받은 임무, 의무 또는 직무는 바울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맡겨진 경제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부름받았기 때문이다( 1:8). 바울의 경제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전체의 경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때가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우리에게 온전히 알려 주셨다. 따라서 교회의 목적이자 사명은 복음을 여러 민족에게 전하고 널리 알리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경제는 여러 나라와 민족에게까지 확장되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그들에게 알려지게 된다( 28:19–20).

이 책의 4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경제윤리를 다룬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한 가정이나 가계의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교회, 기업, 지역사회, 그리고 국가의 구성원으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여러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경제생활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따라서 제4부에서는 가정과 교회, 기업과 지역사회, 그리고 국가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경제생활에서 지켜야 할 윤리와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지 성경의 가르침을 중심으로 연구한다.



1

 

하나님의 경제:

거시경제학적 관점

 


2 하나님의 경제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경제

바울은하나님의 경제 때가 이르렀을 자신의 백성, 믿는 사람들과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행위 또는 계획(경륜)으로 이해하고 있다( 1:9–10; 3:2, 9). 하나님의 경제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루어지는 영적인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필요한 물질적인 삶과 관련된 하나님의 계획과 활동도 포함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경제에는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행위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을 다스리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여러 활동도 포함된다. 이러한 모습은 구약성경과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선포, 특히 요한복음에서 찾아볼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제학을 공부하는 것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개인과 국가 전체가 자신의 만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어떤 의사결정을 하는지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하나님의 경제학 공부하는 것은 하나님의 가계 안에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만족과 행복을 최대한 누리기 위해 어떤 의사결정을 하는지를 알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가계를 축복하신다

하나님의 경제 창세기 1 26–28절에서 처음으로 찾아볼 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1:26–28).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하셨다. 창세기 1 26–27절의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라는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의 외적인 모습을 닮게 창조되었다는 뜻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을 반영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각하고 느끼며, 의지하고 판단할 있는 인격을 주셨다. 또한 양심과 도덕적·윤리적 판단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면 죄책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신실하심과 의로우심도 인간이 본받고 실천해야 성품으로 주어졌다. 또한 하나님은 인간에게 영적인 능력을 주셔서 영과 진리로 하나님을 예배할 있게 하셨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조하신 인간,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며 땅을 정복하기를 원하셨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들이 번성하고 수가 늘어나 땅에 충만하여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세상을 다스리기를 원하셨다.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 땅의 동물과 식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세계는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맡겨졌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 가운데 하나는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 가축과 , 그리고 땅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 그리고 땅의 동물과 식물을 다스리는 능력도 상당 부분 잃게 되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창조되었던 인간의 수명은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5). 인간의 죄와 허물이 땅에 널리 퍼지면서 인간의 수명은 다시 120년으로 제한되었다( 6).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도하나님의 경제’, 하나님의 가계를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하나님은 대홍수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셨다( 6–8). 그리고 창세기 1 28절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주셨던 복의 약속을 창세기 9 1–3, 7절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다시 주셨다. 창세기 9 1–3절은하나님이 노아와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바다의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은 너희의 손에 붙였음이니라 모든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주노라 말한다.  하나님은 창세기 9 7절에서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복에 대해서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 다시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우리는하나님의 경제 처음부터 지향했던 목적을 발견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인간이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는 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경제가 지향하는 이러한 목적은 달라졌는가?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자신의 가계에 속한 그리스도인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창세기 12 1–3절에서 아브람을 부르시며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선택하여 자신의 가계에 속한 사람으로 삼으셨을까? 하나님은 아마도 그의 진실한 마음과 믿음을 미리 아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에게 가지를 약속하셨다. (가나안), 민족, 그리고 복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기 시작할 때마다 하나님은 그에게 계속 나타나셔서, 자신이 하신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다시 확인시켜 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이삭의 아들 야곱에게도 복을 주셨으며,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요셉과 유다에게도 복을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430 동안 종살이를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시고,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하여 그들을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3:8, 17; 13:5; 33:3; 20:24; 6:3; 11:9; 26:9, 15; 27:3; 31:20; 5:6). 땅은 하나님께서 처음 아브라함에게 보여 주셨던 바로 땅이었다.

하나님의 복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계속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에도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며 그들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셨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왔을 하나님의 복도 다시 회복되었다. 이처럼 자신의 가계를 관리하시는 하나님의 활동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복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을 절정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그의 가계를 위하여 준비하신다

하나님은 지혜로우시며 모든 것을 현명하게 행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계, 자신의 백성을 가장 돌보고 다스리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기 때문에 그들에게 주시는 것을 아끼지 않으신다. 인간의 부모가 자녀에게 필요한 것을 기꺼이 마련해 주는 것처럼, 하나님도 자신의 가계에 필요한 것을 언제나 기꺼이 준비해 주신다.

아브라함은준비하시는 하나님’, 여호와 이레(Jehovah-Jireh) 경험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과 함께 모리아 산으로 가는 길에 이삭이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묻자, 아브라함은 이삭에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하였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아들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한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을 , 여호와의 사자가 그가 아들을 죽이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고백한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시리라 말처럼, 그는 뒤를 돌아보다가 뿔이 수풀에 걸린 숫양 마리를 발견하였다. 아브라함은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다.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여호와 이레”, 여호와께서 준비하신다라고 불렀다( 22:14).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은 자신의 가계에 필요한 것을 친히 준비하고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 25–34절에서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고 마실지,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채워 주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제자들에게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신다( 6:31–32).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계에 속한 백성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이여호와 이레’, 준비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던 것처럼, 예수님도 하나님을 자신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공급하시는 하늘 아버지로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그의 가계를 먹이신다

이스라엘 온 회중이 광야에서 먹을 것 때문에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16 4–5절에서 모세에게보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 백성이 나가서 일용할 것을 날마다 거둘 것이라 이같이 하여 그들이 내 율법을 준행하나 아니하나 내가 시험하리라 여섯째 날에는 그들이 그 거둔 것을 준비할지니 날마다 거두던 것의 갑절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어 먹이셨다.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필요한 양식을 친히 준비하고 공급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계를 돌보시고 그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시는하나님의 경제가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서도 계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시고 필요한 양식을 공급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할 수 있다. 잠언 30 7–8절에서 아굴은 하나님께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라고 간구한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도록 말씀하셨다( 6:11; 참조 눅 11:3). 우리가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매일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생명의 떡이라고 선포하신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33절에서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고, 35절에서는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요한복음 648–51절에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선포하신다.

나는이다”(에고 에이미, γώ εμι, egō eimi)라고 자신을 밝히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하늘에서 이 땅으로 내려오셨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어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셨다면, 이제 예수님은 자신을생명의 떡으로 주심으로써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은 그의 가계를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와 함께하시며 그들을 인도하셨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후에도 그들과 동행하며 그들을 인도하셨다. 특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보다 앞서 가시며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이끄셨다. 출애굽기 13 21–22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 모습을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한다. 시편 기자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인도하시는 분임을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라고 고백한다( 48:14).

예수님도 마태복음 28 20절에서 제자들에게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임마누엘(Immanuel),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약속을 이루신 분이시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걸으시며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그의 가계를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계에 속한 사람들을 보호하신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심으로써 그들을 보호하셨다( 3:21). 하나님은 또한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을 보호하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이 여러 곳을 이동하는 동안에도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셨다.

시편 기자는 시편 18 2절에서 하나님을 자신을 보호하고 구원하시는 분으로 고백하며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말한다. 또한 시편 46 1–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환난 가운데 자신의 백성이 피할 수 있는 피난처가 되심을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고백한다. 시편 144 2절에서도 하나님을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으로 고백하며여호와는 나의 사랑이시요 나의 요새이시요 나의 산성이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방패이시니 내가 그에게 피하였고 그가 내 백성을 내게 복종하게 하셨나이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가계에 속한 백성을 돌보실 뿐만 아니라, 위험과 환난 가운데서 그들을 지키고 보호하신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것은 그들을 공급하시고 인도하시는 것과 함께 자신의 가계를 관리하시는하나님의 경제 중요한 활동 가운데 하나이다.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을 마겐(מָגֵן, māgēn), 방패 묘사한다( 3:3; 7:10; 18:2, 30, 35; 28:7; 33:20; 89:18; 115:9–11; 119:114; 144:2). ‘마겐적의 공격으로부터 사람을 지켜 주는 도구이다. 따라서 하나님을방패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위험과 공격으로부터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1]  

시편 기자들은 또한 하나님을 마하세’(מַחֲסֶה, maḥăseh), 피난처, 은신처, 보호처로 묘사한다( 14:6; 46:1; 61:3; 62:7, 8; 71:7; 73:28; 91:2, 9; 94:22; 104:18; 142:5). 마하세는 위험이나 어려움을 피하여 안전하게 머물 수 있는 곳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을피난처라고 부르는 것은 위험과 환난이 닥칠 때 하나님의 백성이 그에게 피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2]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을 '마추드'(מָצוּד, māṣû), 요새, 산성으로도 묘사한다( 18:2; 31:2–3; 71:3; 91:2; 144:2). ‘마추드는 적의 공격을 피하고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견고한 요새나 산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을요새또는산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위험할 피할 있는 안전한 곳이 되시며, 그들을 적의 공격과 위험으로부터 굳건히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3]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을 '미스갑'(מִשְׂגָּב, miśgāḇ), 높은 망대, 산성, 피난처로도 묘사한다( 9:9; 18:2; 46:7, 11; 48:3; 59:9, 16, 17; 62:2, 6; 94:22; 144:2). ‘미스갑 높은 곳에 있어서 적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을 있는 장소, 높은 요새나 산성을 의미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미스갑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이 위험할 피할 있는 안전한 피난처가 되시며, 그들을 높은 곳에서 굳건히 지키고 보호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4]  

하나님은 우리의 방패이시며 피난처이시고 요새와 산성이시다. 하나님은 모든 위험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며, 위험에 처할 우리가 그에게 피하여 안전하게 보호받을 있게 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깃으로 우리를 덮으시고, 우리는 그의 날개 아래에서 안전하게 보호받는다( 17:8; 91:4).

하나님은 그의 가계를 도우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계에 속한 백성이 도움을 구할 때마다 그들을 도우신다. 사무엘상 7 12절은 사무엘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념하여사무엘이 돌을 취하여 미스바와 센 사이에 세워 이르되 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하고 그 이름을 에벤에셀이라 하니라고 말한다.  에벤에셀’(אֶבֶן הָעֵזֶר, ʾeen hāʿēzer)도움의 이라는 뜻이다. 사무엘은 돌을 세움으로써여호와께서 여기까지 우리를 도우셨다 사실을 기억하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은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걸어가는 길에서 그들을 도우셨으며, 그들이 넘어지거나 길을 잃지 않도록 인도하셨다.

시편 기자도 시편 46 4–5절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도우심을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라고 노래한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도움을 구할 때 언제나 그들을 도우실 준비가 되어 계신다. 에스겔 48 35절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과 함께 계심을 나타내는여호와 삼마’(יְהוָה שָׁמָּה, YHWH šāmmâ), 여호와께서 거기에 계시다라는 이름과 관련하여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고 말한다. ‘여호와 삼마라는 이름이 보여 주듯이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멀리 떠나 계시는 분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 가까이에 계시며, 우리가 도움을 구할 때 기꺼이 우리를 도우신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도움을 구하며 자신에게 나아올 언제나 기꺼이 그들을 도와주셨다. 병을 고침받고 위로와 도움을 얻기 위해 자신에게 찾아온 사람들을 외면하거나 거절하지 않으셨다. 이사야 96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기묘자라, 모사라라고 묘사한다.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을 돕는 분으로서, 자신이 떠난 후에는 그들을 도울 다른 보혜사(Another Helper)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요한복음 14 16절에서 예수님은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요한복음 14 26절에서는 이 보혜사가 성령이심을 분명히 밝히시며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성령께서는 다른 보혜사 우리에게 오셨다. 성령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가르치고 도우시며, 우리가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가계를 치료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상처를 입고 그에게 나아올 상처를 치료해 주신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15 26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을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여호와 로페카(יְהוָה רֹפְאֶךָ, YHWH rōp̄eʾḵā)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치료하고 회복시키시는 분임을 보여 준다.

시편 기자도 시편 103 2–3절에서 죄를 용서하시고 질병을 고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며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라고 노래한다. 또한 시편 147 3절은 마음의 상처까지 치유하시는 하나님을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라고 묘사한다.

호세아 6 1절도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권면하며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의 육체적인 질병과 상처만을 치료하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상한 마음을 고치시고 상처를 싸매시며, 죄를 용서하시고 영적으로도 회복시키시는 분이다. 따라서치료하시는 하나님 활동에는 육체적인 치유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의 치유와 회복도 포함된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을 특별히 강조한다. 의사였던 누가가 예수님께 나아온 사람들을 고치신 예수님의 치유 사역에 특별한 관심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6:6–11; 7:1–17, 21; 8:26–56; 9:37–43; 13:10–17; 14:1–6; 17:11–19; 18:35–43).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여호와 라파’(יְהוָה רֹפֵא, YHWH rōp̄ēʾ), 치유하시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치유 사역의 연속이라고 있다.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에 자신의 백성을 치료하고 회복시키셨듯이, 예수님도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고치시고 회복시키셨다. 따라서 예수님의 치유 사역은 자신의 백성을 세심하게 돌보시는하나님의 경제 중요한 부분이다. 하나님의 경제는 인간의 영적인 구원에만 국한되지 않고,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유하고 그들의 삶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활동도 포함한다.

예수님의 이러한 치유 사역은 그의 제자들을 통해서도 계속되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있던 걷지 못하는 사람을 고친 사건( 3:1–10), 베드로가 애니아를 고치고 죽은 다비다를 살린 사건( 9:32–43), 그리고 바울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 죽은 유두고를 다시 살린 사건( 20:7–12)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신 치유와 회복의 사역은 제자들을 통해서도 계속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가계를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각자가 자신의 가계를 성공적으로 관리하고 운영할 있도록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412에서 모세에게 이제 가라 내가 입과 함께 있어서 말을 가르치리라고 말씀하셨다.

이사야 54 13절은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는 그의 백성에 대하여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니 네 자녀에게는 큰 평안이 있을 것이며라고 말한다. 시편 기자도 시편 71 17절에서 자신이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아 왔음을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전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다.

가르치다, 교훈하다, 지도하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 야라(יָרָה, yārâ)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는 것을 표현할 때 사용된다.[5] 이 동사와 관련된 명사가 토라(תּוֹרָה, tôrâ)이다. 토라는 문자적으로가르침또는교훈을 의미하지만, 일반적으로 모세오경(Pentateuch), 곧 창세기부터 신명기까지의 다섯 권을 가리키며 흔히율법으로 번역된다. 또한 토라는 율법에 관한 구전 전통을 가리키기도 하며, 더 넓은 의미에서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가르침과 교훈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토라는 단순히 지켜야 할 법이나 규정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하나님의 교훈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계에 속한 백성이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자신의 가계를 지혜롭게 관리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인도하시는 분이다.

가르치는 일은 치유하는 일과 함께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치셨다. 부활하신 후에도 승천하시기 전까지 사십 일 동안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시며 그들을 가르치셨다( 1:3). 예수님은 마태복음 28 19–20절에서 제자들에게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예수님의 가르치는 사역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이어졌다.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도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가계에 들어오도록 인도하는 사명을 계속 수행한다. 이처럼 가르치는 일은 사람들을 하나님의 가계로 인도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돕는하나님의 경제의 중요한 활동 가운데 하나이다.

하나님은 그의 가계에 승리를 주신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이 삶에서 승리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각 사람은 삶에서 마주하는 여러 싸움과 어려움을 이겨 냄으로써 더 큰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행진할 때에도,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하나님은 그들이 여러 전쟁과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도우셨다. 출애굽기 17장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과 싸웠을 때에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놀라운 승리를 주셨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아말렉과 싸우는 동안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었다.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겼다. 모세의 손이 피곤해지자 아론과 훌이 그의 양쪽에서 손을 붙들어 올렸고, 마침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은 아말렉을 물리쳤다( 17:8–13). 이 승리 후에 모세는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여호와 닛시’(יְהוָה נִסִּי, YHWH nissî), 여호와는 나의 깃발이시다라고 불렀다. 출애굽기 1715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모세가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여호와 닛시라는 이름은 이스라엘의 승리가 그들 자신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하시고 승리를 주셨기 때문에 가능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계에 속한 백성이 삶에서 마주하는 어려움과 싸움을 이겨 내도록 도우시며, 그들에게 승리를 주시는 분이다.

바울도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다고 말한다. 고린도전서 1556–57절에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궁극적인 승리는 죄와 사망에 대한 승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죄와 사망을 이기는 승리를 주신다.

바울은 또한 하나님께서 주실 승리를 믿으며 우리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우도록 권면한다. 그는 자신의 삶과 사역을 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7–8).

바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은 끝까지 싸워야 할 선한 싸움이며, 끝까지 달려야 할 경주이다. 그러나 그 싸움의 궁극적인 승리는 인간의 힘만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사람들은 믿음을 지키며 자신의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려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에게 마침내 승리와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그의 가계를 다스리시는 활동들

성경, 곧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 나타난하나님의 경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계를 다스리고 관리하시는 여러 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계를 창조하여 세우시고, 그 안에 속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고 먹이시며, 그들이 가야 할 길을 인도하시고, 위험으로부터 보호하시며, 그들을 가르치고 교훈하시고, 악한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도록 도우시는 활동 등이 포함된다.

이 장의 처음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의 경제가 지향하는 목적은 자신의 백성이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가계를 세우신 후 그 안에 속한 백성을 돌보고 다스리시며,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아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도록 이끌어 가신다.

이상에서 논의한 하나님의 경제는 오늘을 살아가는 개인과 정부에도 중요한 가르침을 준다. 개인은 자신의 생명과 재산, 소득과 재능을 자신의 절대적인 소유로 여기기보다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으로 이해하고, 하나님의 관리자이자 청지기로서 이를 책임 있게 사용해야 한다. 따라서 경제적 의사결정에서도 자신의 필요와 이익만을 추구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이웃의 필요를 돌아보아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고, 인도하시며, 보호하시고, 도우시며, 치료하시고, 가르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그분을 의지해야 한다.

정부 역시 국가의 자원과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할 있는 절대적인 소유자로 생각해서는 된다. 하나님의 경제라는 관점에서 , 정부의 권한과 자원도 국민의 삶을 보호하고 공동체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정의와 공평을 실현하기 위하여 책임 있게 사용되어야 한다. 특히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보호하고, 국민이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하며 살아갈 있는 경제적 환경을 조성하고, 공공의 자원을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정부의 중요한 책임이다. 결국 개인과 정부 모두 자신에게 맡겨진 자원과 권한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경제 주체이며, 하나님의 경제라는 관점에서 결정에 대한 책임을 하나님 앞에서 져야 한다.



[1] Strong’s Hebrew Concordance, “4043. magen 또는 meginnah,BibleHub.

[2] 같은 자료, “4268. machaseh 또는 machseh,” BibleHub.

[3] 같은 자료, “4686. matsuwd,” BibleHub.

[4] 같은 자료, “4869. misgab,” BibleHub.

[5] 같은 자료, “3384. yarah 또는 yara,” BibleHub.



3 양식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왜 돈을 버는가? 먹을 것을 사고, 옷을 입으며, 살아갈 집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번다. 사람은 누구도 먹을 것 없이 살아갈 수 없다. 따라서 양식은 인간의 삶뿐만 아니라 경제활동에서도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나님은 창조의 시작부터 자신의 백성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모든 생물에게도 먹을 것을 주셨다. 처음 하나님께서 인간과 모든 생물에게 주신 먹을 것은 고기가 아니라 푸른 식물이었다.

하나님은 창세기 1 29–30절에서 인간과 모든 생명체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시는 분으로서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 거리가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하늘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먹을 거리로 주노라고 말씀하신다. 이처럼 창조의 처음에 하나님은 인간에게 씨 맺는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를 먹을 것으로 주셨으며, 다른 생물에게도 푸른 풀을 먹을 것으로 주셨다.

그러나 대홍수 이후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고기를 먹는 것을 허락하심으로써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의 범위를 넓혀 주셨다. 창세기 9 3–4절에서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 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나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째 먹지 말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기를 먹는 것을 허락하셨지만, 생명 되는 피와 함께 고기를 먹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셨다. 성경에서 피는 생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생명의 주권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기를 피째 먹지 말라는 명령은 인간이 생명의 주인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서 그 주인이심을 인정하도록 하는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떠나 광야를 행진할 때 먹을 것이 떨어지자, 그들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불평하였다. 그러자 하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양식인 만나와 메추라기를 그들에게 주셨다. 하나님은 출애굽기 16 12절에서 모세에게내가 이스라엘 자손의 원망함을 들었노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해 질 때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부르리니 내가 여호와 너희의 하나님인 줄 알리라 하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먹을 것이 없는 광야에서도 자신의 백성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셨다. 저녁에는 메추라기를 보내어 고기를 먹게 하시고, 아침에는 만나를 내려 그들을 배부르게 하셨다. 이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하나님은 레위기 11장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음식에 관한 규례를 주시고, 무엇을 먹을 수 있으며 무엇을 먹어서는 안 되는지를 가르쳐 주셨다. 하나님은 정결한 동물과 부정한 동물을 구별하시고, 자신의 백성이 정결한 것으로 구별된 음식만을 먹도록 하셨다. 이러한 음식 규례 가운데 일부는 오늘날의 의학적 관점에서 볼 때 위생과 건강에 도움이 되는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스콧 멍거(Scott Munger)는 양식(糧食)이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가는 존재임을 보여 주며,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고 지적한다.[1] 신명기 8 3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먹이신 목적을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광야에서 주리게 하신 후 만나를 먹이신 것은 그들에게 육신의 양식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었다. 인간은 먹을 것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지만, 육신의 양식만으로 살아가는 존재도 아니다. 인간의 생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의지하여 살아가야 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신을 위한 양식을 공급하실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우리의 영을 위한 영적인 양식, 곧 하나님의 말씀도 공급하신다. 육신이 살아가기 위해 매일 양식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우리의 영적인 삶도 하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한다.

생명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이사야 55 1–2절에서 모든 목마른 사람을 생명의 근원이 되는 물로 초청하시며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오는 사람은 돈이 없어도,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양식과 마실 것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자신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기꺼이 공급해 주시는 분이다. 이사야의 말씀은 단순히 육신을 위한 음식과 음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돈으로 살 수 없고 인간의 수고만으로 얻을 수 없는 참된 만족과 생명을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사람들은 자신을 진정으로 만족시키지 못하는 것을 얻기 위해 돈과 수고를 사용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에게 나아오는 사람들에게 참된 양식과 생명을 값없이 베풀어 주신다.

생명의 떡되신 예수님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면서 하나님께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도록 하셨다( 6:11; 참조 눅 11:3). 우리가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매일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육신의 양식보다 더 중요한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에 대해서도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생명의 떡이라고 선포하신다. 요한복음 6 33절에서 예수님은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이어 35절에서는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밝히시며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48–51절에서도 자신이 생명의 떡이며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임을 선포하시며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를 주어 그들의 육신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셨다면, 이제 예수님은 자신을생명의 떡으로 주심으로써 그를 믿는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매일 필요한 육신의 양식을 공급하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원한 생명을 위한 참된 양식도 주시는 분이다.

마태복음 1413–21, 마가복음 6 30–44, 누가복음 910–17절과 요한복음 61–13절에서 볼 수 있듯이, 예수님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여자들과 어린이들 외에 오천 명을 먹이셨다.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은 후 제자들이 남은 조각을 거두었더니 열두 바구니에 가득 찼다. 마태복음 15 32-39절과 마가복음 8 1-10절에 기록된 것 같이, 또 다른 때에는 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마가복음 8 1-10절에는 떡 일곱 개만으로) 여자들과 어린이들 외에 사천 명을 먹이셨다. 모든 사람이 배불리 먹은 후 제자들이 남은 조각을 거두었더니 일곱 광주리에 가득 찼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온 사람들을 먹이셨다. 이 세상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희소하지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 필요한 양식을 충분히 공급하시는 분이시다. 오병이어(五餠二魚)와 칠병이어(二魚)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의 필요를 아시고 그들을 풍성하게 먹이시는하나님의 경제를 잘 보여 준다.

양식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것이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 25절에서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31절에서 다시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백성이 될 때, 하나님은 그 가계의 주인으로서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신다. 예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신 것처럼, 하늘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자녀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이미 알고 계신다( 6:32).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신의 백성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고 먹이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계를 다스리시는 매우 중요한 통치 활동이며 동시에하나님의 경제를 이루는 중요한 활동이다. 창조 때부터 하나님은 자신의 피조물에게 먹을 것을 주셨고, 광야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셨으며, 예수님은 자신에게 나아온 사람들을 먹이셨다. 이처럼 자신의 백성에게 필요한 양식을 공급하시는 일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계속해서 나타나는하나님의 경제의 중요한 모습이다. 

음식 규례에 관한 논쟁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는 이방인들이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면서, 하나님께서 구약성경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던 유대인의 음식 규례( 11)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도 지켜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당시 유대인과 이방인은 서로 다른 생활 방식과 음식 규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하나의 신앙 공동체를 이루는 데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따라서 유대인의 음식 규례를 지키지 않았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결정이 필요하였다.

예루살렘 회의에서 예수님의 형제이며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이방인 신자들에게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권고할 것을 제안하였다( 15:20). 예루살렘 회의는 야고보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방인 신자들에게 편지를 보내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지니라고 결정하였다( 15:29). 이 결정에 따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의 모든 음식 규례를 그대로 지킬 의무를 지지는 않았지만, 우상에게 바친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을 멀리하도록 요구받았다. 이러한 결정은 서로 다른 음식 전통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 신자와 이방인 신자가 하나의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기 위한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부정(不淨)한 음식과 이방인들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기도하던 중 비몽사몽간에 세 번에 걸쳐 같은 환상을 보았다. 그는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안에는 여러 종류의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들이 들어 있었다. 그때 한 음성이 베드로에게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라고 말씀하였다( 10:13). 그러자 베드로는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10:14). 그때 다시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10:15).

이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보자기는 곧 하늘로 올려졌다( 10:16). 베드로가 환상에서 본 보자기 속의 부정(不淨)한 음식은 단순히 음식에 관한 문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어지는 사도행전 10장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이 환상은 이방인들, 특히 고넬료와 그의 가족을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신다는 사실을 베드로에게 깨닫게 하는 것이었다. 베드로 자신도 그 의미를 깨닫고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10:28)라고 말한다. 이 사건은 베드로와 다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방인들과 교제하고 그들을 기독교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사람을 더 이상 부정하다고 여겨서는 안 되었다. 이로써 복음은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들에게까지 더욱 널리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祭物)

예루살렘 회의에서 내린 결정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지 말도록 요구하였다. 그러나 당시 시장에서 판매되는 고기 가운데 어떤 것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고 어떤 것이 그렇지 않은지를 구별하기는 쉽지 않았다. 따라서 일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시장에서 구입한 음식이 혹시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면서 죄책감을 가지고 먹기도 하였다( 14:23; 고전 8:7). 특히 우상 숭배의 배경을 가지고 있던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는 문제에 대하여 여전히 양심의 거리낌을 느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87절에서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 말한다(개역개정). 따라서 음식 자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그 음식을 먹는 사람의 믿음과 양심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바울은 음식 문제로 양심의 어려움을 겪는 믿음이 약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이 문제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한다. 바울은 로마서 14 17절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을 먹고 마시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시장에서 구입한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인지 알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먹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음식을 먹는 것이 믿음이 약한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걸림돌이 된다면, 그 사람을 배려하여 자신의 자유를 절제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14 21절에서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하여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고 말한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8 13절에서 음식 문제에 관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고 말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어떤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에게 어떤 음식을 먹을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자유의 행사가 믿음이 약한 형제자매를 실족하게 한다면 사랑으로 그 자유를 기꺼이 절제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받아 주신 형제자매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다.

성찬(聖餐)의 음식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하신 마지막 만찬에서 떡을 가지사 감사 기도를 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 22:19; 고전 11:24). 또한 식사 후에 잔을 가지시고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22:20; 고전 11:25).

그리스도인들은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을 주시기 위하여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시고 피를 흘리셨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성찬의 떡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그리스도의 몸과 흘리신 피를 가리키며,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음을 기억하게 한다. 따라서 성찬은 단순히 함께 음식을 먹고 마시는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고 그를 통하여 주어진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신앙의 행위이다.

이상에서 논의한 양식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우리가 매일 먹고 마시는 양식은 단순히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먹을 것을 주셨고, 광야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와 고기를 공급하셨으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가르치셨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의 양식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보다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감사하며,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하여 성실하게 일하되 물질에 대한 지나친 염려와 탐욕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양식은 육체를 위한 음식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며,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생명의 떡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육체적 필요뿐 아니라 영적인 필요도 있으며, 물질적인 풍요만으로 인간의 삶이 온전해질 수 없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음식에 관한 자신의 자유를 행사할 때에도 다른 사람의 믿음과 양심을 배려해야 한다. 결국 성경이 가르치는 양식의 경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공급하시는 분임을 인정하고, 주어진 양식에 감사하며, 이웃과 나누고, 물질적인 양식을 넘어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4 토지

자원(資源)에는 토지(土地), 노동(勞動)과 자본(資本)이 포함된다. 토지는 자연자원이라고도 하며, 노동은 인적자원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토지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토지에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수확한다. 토지에 공장을 세워 여러 가지 재화를 생산하기도 하고, 집을 지어 생활하기도 한다. 또한 토지를 사고팔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토지는 생산과 생활에 필요한 중요한 자원일 뿐만 아니라 투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에덴동산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살게 하신 첫 번째 땅이었다. 창세기 2 8절은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마련하시고 아담을 그곳에 두신 것을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고 말씀한다. 또한 창세기 2 15절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그 땅을 관리할 책임을 맡기신 것을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라고 말씀한다.

최초의 낙원이었던 에덴동산은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아름답고 비옥한 땅이었다. 그곳에는 여러 종류의 동물과 식물이 있었으며,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들도 풍성하였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설하시고 복을 주셔서 최초의 인간을 그곳에 살게 하셨을 때, 에덴동산에는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자원이 풍성하게 주어져 있었다. 따라서 처음 에덴동산에서는 자연자원의 부족으로 인한 희소성(稀少性)의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하나님은 하와를 창조하시기 전에 창세기 2 16–17절에서 아담에게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께 속한 땅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땅에서 살아가는 최초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풍성하게 주셨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한 가지 제한을 제외하고는 동산의 각종 나무의 열매를 자유롭게 먹을 수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땅에서 살아가는 최초의 인간에게는 먹을 것이 부족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자신의 땅을 인간에게 맡겨 경작하고 지키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땅에서 나오는 풍성한 열매를 누리도록 허락하셨다.

아담과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살 수 있는 자리를 잃게 되었다. 창세기 3 24절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하나님께서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막으신 것을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불 칼을 두어 그들이 생명 나무로 다시 나아가는 길을 막으셨다는 점에서, 아담과 하와가 동산에서 쫓겨난 후 동쪽 지역에서 살았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에덴동산을 떠난 후 정확히 어느 지역에서 살았는지는 말해 주지 않는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지만, 하나님과 그들 및 그 자녀들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창세기 4장에서 가인과 아벨은 자신들이 얻은 소산을 여호와께 제물로 드렸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다( 4:3–4).

그러나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후에는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였다. 창세기 4 16절은 가인이 하나님 앞을 떠나 에덴의 동쪽에 정착한 것을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 땅에 거주하더니라고 기술하고 있다. 놋 땅이 에덴의 동쪽에 있었다는 사실은 가인이 에덴동산에서 더욱 동쪽으로 멀어져 갔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이처럼 인간은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처음 주신 에덴의 땅을 잃었고, 가인의 경우에는 다시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 앞을 떠나 다른 땅으로 옮겨 가게 되었다.

갈대아인의 우르 땅

대홍수 이후 노아의 세 아들의 후손들은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 나갔다. 그들은 여러 민족을 이루어 각자의 땅에 흩어져 살게 되었다( 10). 바벨탑 사건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온 지면에 더욱 흩으셨다. 창세기 11 9절은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고 말한다.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이며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는 갈대아인의 우르 땅에 살았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여러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그를 부르셨다. 이 부르심을 통하여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던 땅을 떠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땅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었다( 11–12).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갈대아인의 우르 땅, 곧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에 있을 때 그를 부르셨다. 창세기 11 31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아들 아브람과 며느리 사래, 그리고 손자 롯을 데리고 가나안 땅으로 가기 위하여 갈대아인의 우르 땅을 떠났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하란, 곧 오늘날의 튀르키예 지역에 이르러 그곳에 정착하였다( 11:31).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이 가나안으로 가는 여정은 하란에서 한동안 멈추게 되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하란에서 이백오 세를 살고 죽었다( 11:32). 그 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란을 떠나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향하여 다시 길을 떠났다.

가나안 땅

그 후 하나님은 창세기 12 1절에서 아브라함을 다시 부르시며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일흔다섯 세에 하란을 떠났다( 12:4).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도착하였다( 12:5–6). 그러나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했다고 해서 그 땅이 곧바로 그의 소유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 12:7). 따라서 아브라함에게 가나안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장차 그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었다. 하나님은 그 후에도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이 땅에 대한 약속을 거듭 확인해 주셨다( 12:7; 13:15; 15:7, 18; 17:8; 24:7).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을 계속해서 말씀하시며,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을 확인해 주셨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서 실제로 소유할 수 있었던 유일한 땅은 그의 아내 사라를 장사하기 위하여 헷 족속 에브론에게서 값을 주고 산 땅이었다. 창세기 23장에는 아브라함이 사라를 장사할 매장지를 마련하기 위하여 막벨라 밭과 그 안에 있는 굴을 구입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23 19–20절은그 후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 사라를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더라 (마므레는 곧 헤브론이라) 이와 같이 그 밭과 거기에 속한 굴이 헷 족속으로부터 아브라함이 매장할 소유지로 확정되었더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 전체를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아브라함 자신이 생전에 실제로 소유한 땅은 사라를 장사하기 위하여 구입한 막벨라 밭과 굴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에서 살아가고 있었지만, 그 땅의 대부분을 자신의 소유로 갖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막벨라 밭과 굴은 장차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대한 일종의 보증(保證) 또는 계약금(契約金)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아브라함이 소유하게 된 이 작은 땅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더 큰 땅의 성취를 미리 보여 주는 첫 소유지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신 모든 것, 곧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는 것을 포함한 모든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다(고후 1:22; 1:14). 성령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보증이며, 계약금 또는 첫 번째 지불금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에베소서 1 14절에서 성령을우리 기업의 보증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집이나 토지를 구입할 때 구매자는 그 부동산을 실제로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나타내기 위하여 계약금이나 보증금을 지불한다. 계약금은 전체 금액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나머지 금액을 지불하여 거래를 완성하겠다는 의사를 보여 준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기업을 장차 온전히 주실 것이라는 보증이다.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그의 아들 야곱, 그리고 그들의 가족도 가나안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갔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땅을 자신들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아직 그 약속의 땅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한 채 그곳에 거주하였다. 이후 야곱과 그의 가족은 애굽으로 이주하였다. 그곳에는 야곱의 아들 요셉이 먼저 가 있었으며, 그는 이미 애굽에서 바로 다음가는 높은 지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다.

애굽 땅

토지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을 연결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였다. 가나안 땅에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 야곱은 자신의 아들 요셉이 애굽에서 높은 지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야곱에게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환상 가운데 야곱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창세기 46 2–4절은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며야곱아 야곱아 하시는지라 야곱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버지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의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이미 오래전에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들이 다른 나라에서 나그네가 되어 사백 년 동안 그들을 섬기며 괴롭힘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괴롭힌 나라를 심판하시고, 그 후에는 그들이 많은 재물을 이끌고 나오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15:13–14). 그리고 마침내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주실 것이었다. 따라서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포기하신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야곱에게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반드시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약속의 땅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가더라도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하셨으며, 때가 되면 그들의 후손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었다.

요셉을 포함하여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가족은 모두 칠십 명이었다( 46:27). 사도행전 7 14절에서 스데반은 이들의 수를 칠십오 명이라고 말한다. 요셉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야곱과 그의 가족이 애굽에서 존중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요셉이 죽고 그를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애굽을 다스리게 되면서 상황은 크게 달라졌다.

이스라엘 백성, 곧 히브리인들은 애굽 사람들의 노예가 되어 힘든 노동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들은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고된 일을 해야 했다. 출애굽기 1 14절은 애굽 사람들이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고 말씀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세월 애굽에서 살아가면서 자유와 약속의 땅을 잃은 채 고된 종살이를 하였다. 출애굽기 12 40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 기간을 사백삼십 년이라고 기록한다. 긴 세월이 흐르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에 대한 기억도 그들 가운데 희미해졌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결코 잊지 않으셨으며,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과 그의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약속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다( 12:7).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노예로 살아가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여전히 유효하였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잊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과 그들에게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신다.

다시 가나안 땅으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면서 애굽에서 고통받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여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기 3 17절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고난에서 구원하여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말씀하시며내가 말하였거니와 내가 너희를 애굽의 고난 중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땅으로 올라가게 하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가나안 땅에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떠돌아야 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가나안 땅은 그들 앞에 있었지만,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해야 했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모세가 죽은 후에는 여호수아가 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었다. 여호수아의 인도 아래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강을 건너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으며, 그곳의 여러 성읍을 차례로 정복해 나갔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실제로 주어지기 시작하였다.

토지의 분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부터 하나님은 이미 모세를 통하여 그 땅을 어떻게 분배할 것인지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민수기 26 53–56절에서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의 수에 따라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하도록 명하시며이 명수대로 땅을 나눠 주어 기업을 삼게 하라 수가 많은 자에게는 기업을 많이 줄 것이요 수가 적은 자에게는 기업을 적게 줄 것이니 그들이 계수된 수대로 각기 기업을 주되 오직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누어 그들의 조상 지파의 이름을 따라 얻게 할지니라 그 다소를 막론하고 그들의 기업을 제비 뽑아 나눌지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토지 분배에는 두 가지 중요한 원칙이 나타난다. 먼저 각 지파의 인구 규모를 고려하여 사람이 많은 지파에는 더 많은 기업을 주고, 사람이 적은 지파에는 더 적은 기업을 주도록 하셨다. 따라서 모든 지파에게 똑같은 크기의 토지를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 각 지파의 인구에 따라 토지의 크기를 다르게 분배하도록 하셨다. 동시에 각 지파가 어느 지역의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인지는 제비를 뽑아 결정하도록 하셨다. 따라서 가나안 땅의 분배는 각 지파의 필요, 곧 인구의 규모를 고려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느 땅을 받을 것인지는 제비뽑기를 통하여 결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제비뽑기는 단순한 우연에 맡기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방법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각 지파에 토지를 공정하게 분배하고, 토지 분배를 둘러싼 지파들 사이의 불평과 분쟁을 줄일 수 있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의 대부분을 정복한 후,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원칙에 따라 그 땅을 각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하였다( 13:8–19:51). 각 지파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는 일이 끝난 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에게도 그들 가운데서 기업을 주었다. 여호수아기 19 49절은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의 기업의 땅 나누기를 마치고 자기들 중에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기업을 주었으니라고 말씀한다.

한편, 토지를 기업으로 분배받지 못한 레위 지파에게도 그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성읍과 목초지가 주어졌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받은 기업 가운데서 레위인들이 거주할 성읍과 그들의 가축을 위한 목초지를 주도록 명령하셨다( 35:1–8). 이에 따라 레위의 후손인 고핫 자손과 게르손 자손과 므라리 자손에게 모두 마흔여덟 개의 성읍과 그 주변의 목초지가 주어졌다( 21). 이 가운데 여섯 성읍은 사람을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죽인 사람이 피할 수 있는 도피성으로 정해졌다. 따라서 가나안 땅의 분배에서 레위 지파가 다른 지파들처럼 일정한 지역을 기업으로 받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의 생활에 필요한 토지가 전혀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에게도 거주할 성읍과 가축을 기를 목초지를 마련해 주심으로써 그들의 기본적인 생활에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셨다.

토지의 경작(耕作)

하나님은 레위기 25 2절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그 땅도 안식하게 하도록 명하시며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육 년 동안 밭에 씨를 뿌리고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수 있었지만, 일곱째 해에는 그 땅도 안식하게 해야 했다. 하나님은 또한 레위기 25 3–4절에서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 일곱째 해에는 그 땅이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여호와께 대한 안식이라 너는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가꾸지 말며라고 말씀하셨다. 따라서 일곱째 해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밭에 씨를 뿌리거나 포도원을 가꾸어 평상시처럼 농사를 지어서는 안 되었다. 사람에게 안식일이 필요했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도 안식이 필요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토지를 계속해서 생산물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만 사용해서는 안 되었으며,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일곱째 해마다 그 땅을 쉬게 해야 했다.

하나님은 안식년에는 땅을 쉬게 해야 하므로, 저절로 자라난 곡식을 거두거나 가꾸지 않은 포도나무에서 열린 포도를 수확하지 말라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셨다( 25:5). 그러나 안식년 동안 땅에서 자연적으로 난 소출은 이스라엘 백성과 그들의 가족뿐만 아니라 종과 품꾼과 함께 거류하는 사람들의 먹을 것이 되었다. 또한 그 땅의 가축과 들짐승도 그 소출을 먹을 수 있었다( 25:6–7). 따라서 안식년은 단순히 농사를 짓지 않고 땅을 쉬게 하는 제도만은 아니었다. 땅이 안식하는 동안 자연적으로 생산된 소출은 토지 소유자가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계에 속한 사람들과 주변의 사람들, 그리고 가축과 들짐승까지 함께 누릴 수 있었다. 하나님은 땅에 안식을 주시는 동시에 그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과 동물에게 필요한 양식도 공급하셨다.

토지의 소유권

구약성경에서 모든 토지의 궁극적인 소유권은 하나님께 속한다.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당연한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땅을 소유하고 사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땅의 궁극적인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모세는 출애굽기 9 29절에서 바로에게 땅의 궁극적인 주권자가 하나님이심을 밝히며세상이 여호와께 속한 줄을 왕이 알리이다라고 말한다. 또한 신명기 10 14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라고 말함으로써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성경의 관점에서 인간의 토지 소유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모든 땅의 궁극적인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을 맡아서 사용하고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토지 소유의 원리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안식년과 희년의 토지 제도를 이해하는 중요한 기초가 된다.

토지에 대한 이차적인 소유권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모든 토지의 궁극적인 소유자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이 받은 토지를 영구적으로 팔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해져서 자신의 토지를 팔게 되었을 경우에는 형편이 나아지면 그 땅을 다시 살 수 있었다. 만일 자신이 그 땅을 다시 살 능력이 없으면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를 대신하여 그 땅을 되사 주어야 했다. 그러나 본인이나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되살 수 없으면 그 토지는 희년까지 구매자의 소유로 남아 있었다. 희년이 되면 그 땅은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아가고, 그는 다시 자신의 소유지로 돌아갈 수 있었다( 25:23–28).

하나님은 레위기 25 23–24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땅의 궁극적인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밝히시며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성경에서 토지 소유권의 성격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지를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그 땅을 소유하고 사용하며 그 소출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소유권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었다. 토지의 궁극적인 소유자는 하나님이셨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땅에서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가난 때문에 토지를 잃게 되더라도 그것이 영구적인 토지 상실로 이어지지 않도록 토지를 되살 수 있는 길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마저 불가능할 경우 희년에는 토지가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아가도록 하셨다. 이러한 제도는 토지가 소수의 사람들에게 영구적으로 집중되는 것을 제한하고, 하나님께서 각 가문에 주신 기업이 세대를 이어 유지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다. 

토지의 무르기

하나님은 레위기 25 24–25절에서 가난으로 인해 기업의 일부를 팔게 된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을 다시 되찾을 수 있도록 토지 무르기의 원칙을 정하시며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사람이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자신의 토지를 팔았을 경우, 그의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 땅을 다시 사서 되찾아 주어야 했다. 이처럼 가난한 친족을 대신하여 팔린 토지를 무르는 가장 가까운 친족을 히브리어로 고엘(גֹּאֵל, gōʾēl), 무르는 자또는기업 무를 자라고 하였다. 고엘은 단순히 토지를 구입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가문의 기업을 잃게 된 친족을 대신하여 그 토지를 되사 줌으로써, 하나님께서 그 가문에 주신 기업이 다른 사람에게 영구적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역할을 하였다. 따라서 토지의 무르기 제도는 가난으로 인해 토지를 잃은 사람과 그의 가계를 보호하고, 하나님께서 각 가문에 주신 기업을 보존하기 위한 제도였다.

룻기에 등장하는 엘리멜렉과 나오미는 두 아들과 함께 베들레헴에 살고 있었으나, 그 땅에 기근이 들자 모압 지방으로 가서 거류하였다. 모압에서 엘리멜렉이 죽고, 두 아들도 모압 여인들과 결혼한 후 모두 죽었다. 그 후 나오미는 며느리 룻과 함께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 나오미에게는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를 수 있는 가까운 친족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가까운 친족이 그 기업을 무르기를 거절하자, 그다음으로 가까운 친족인 보아스가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기로 하였다( 4). 보아스는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속했던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사고, 말론의 아내였던 룻을 자신의 아내로 맞아 죽은 사람의 이름이 그의 기업에서 끊어지지 않도록 하였다. 이로써 보아스는 나오미와 룻의 기업을 무르는 자, 곧 고엘(גֹּאֵל, gōʾēl)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보아스의 고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미리 보여 주는 모형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보아스가 가까운 친족으로서 나오미와 룻에게 다가가 잃어버린 기업을 무르고 그 가문을 회복시켜 주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의 구속자(救贖者)가 되셨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아스가 잃어버린 기업을 무른 사건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간이 잃어버린 기업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회복하시는 구속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이해할 수 있다. 보아스가 값을 지불하여 기업을 무르고 룻을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들였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써 죄 아래 있는 사람들을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가계에 속한 사람들로 받아 주셨다.

예수님은 사탄을이 세상의 임금이라고 부르신다( 12:31; 16:11). 이는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 이 세상에서 사탄이 일정한 권세를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바울도 사탄을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고 부른다( 2:2). 그러나 사탄의 권세는 절대적이거나 영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제한된 권세이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6 19–20절에서 그리스도인의 몸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강조하며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말한다. 또한 디도서 2 14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여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셨음을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자신의 피를 흘리고 생명을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를 죄와 불법에서 속량하셨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며, 그 값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내어 주신 자신의 생명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토지의 무르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그리스도의 구속은 고엘(גֹּאֵל, gōʾēl)의 역할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처음 주신 생명과 에덴의 기업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자신의 생명을 값으로 지불하시고 우리를 구속하셨다. 이러한 의미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생명과 기업을 회복시키시는 우리의 구속자, 곧 참된 고엘이 되신다.

이상에서 논의한 토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의 부동산 소유와 투자에도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성경은 개인의 토지 소유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25:23)는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토지의 궁극적인 소유자는 하나님이시며 인간의 소유권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위탁된 소유권으로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주택이나 토지와 같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투자하는 것 자체를 잘못된 것으로 볼 필요는 없지만, 그 소유와 투자가 절대적인 권리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부동산 투자를 통하여 재산을 형성하고 수익을 얻는 것도 정당한 경제활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더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더 높은 수익을 얻는 것만이 투자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특히 다른 사람의 어려운 형편을 이용하여 지나친 이익을 얻거나, 투기적인 거래로 가격 상승만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의 기본적인 주거 필요를 외면하는 것은 이웃 사랑과 청지기적 책임이라는 성경의 원리에 비추어 돌아볼 필요가 있다. 레위기의 안식년과 토지 무르기 제도는 고대 이스라엘에 주어진 제도이므로 오늘날의 부동산 시장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지만, 토지의 사용과 소유에는 개인의 이익뿐 아니라 공동체에 대한 책임도 따른다는 원리를 보여 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부동산을 소유하거나 투자할 때얼마나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만을 질문해서는 안 된다. 그 재산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임을 인정하고, 그것을 정직하고 공정하게 취득하고 관리하며, 자신의 가족을 돌보는 동시에 이웃과 공동체에 미치는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결국 성경적 관점에서 부동산 소유와 투자의 핵심은 소유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맡기신 토지와 재산을 어떤 목적과 방법으로 관리하고 사용하는가에 있다.

 

 

5 노동

노동은 또 하나의 중요한 자원이며, 인적자원이라고도 한다.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신 것도 노동 또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창세기 2 2–3절에서 하나님의 창조 활동은 히브리어 멜라크토(מְלַאכְתּוֹ, melakhto), 그가 하시던 일이라는 말로 표현되며,[1] 하나님은 그 일을 마치신 후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 2:2–3). 이 단어의 기본형은 멜라카(מְלָאכָה, melāʾkhāh)로서,” “노동,” “작업또는직무등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가리키는 데 사용된 이 단어는 인간이 하는 일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된다( 39:11; 왕상 7:14; 대하 16:5; 4:15). 따라서 성경에서 노동은 인간의 타락 이후에 비로소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활동에서부터 나타나는 중요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경제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된 인간에게 복을 주시는 데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이 세상에서 일하며,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관리하고 돌보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노동의 시작

경작하다또는일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바드(עָבַד, ʿābad)로서섬기다,” “노동하다,” “일하다,” 또는경작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2] 아바드(עָבַד)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지으시기 전의 상황을 설명하는 창세기 2 5절에서 처음 사용된다. 당시에는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아직 땅을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 그 후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고( 2:7), 인간의 노동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창세기 2 15절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어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하셨다. 여기에서경작하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아바드(עָבַד)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 땅과 식물과 나무들을 경작하고 돌보게 하셨다. 아담의 이러한 노동은 단순히 땅을 경작하는 경제 활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청지기이자 종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기도 하였다. 아바드가일하다또는경작하다와 함께섬기다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노동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에덴동산에서 땅과 식물과 나무들을 경작하고 돌보는 노동은 분명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복의 일부였다. 타락 이전의 노동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짐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하면서 노동의 기쁨과 그 열매를 누렸을 것이다. 따라서 노동 자체가 인간의 죄에 대한 저주의 결과는 아니었다. 노동은 인간의 타락 이전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창조의 사명이자 하나님의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의 일이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타락하였다. 하나님은 창세기 3 16절에서 여자에게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여성이 아이를 낳는 과정을 영어로도 “labor”라고 부르는데, 이는 출산이 큰 수고와 고통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타락 이후 출산의 고통은 크게 증가하였다. 하나님께서 하와에게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출산과 관련된 수고와 고통이 타락 이후 인간이 경험하게 된 고통스러운 현실의 한 부분이 되었음을 보여 준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지 않았고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도 없었다면, 여성의 출산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같은 큰 고통을 수반하지 않았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 자체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이었지만( 1:28), 타락 이후에는 그 복을 이루어 가는 과정에 수고와 고통이 더해진 것이다.

하나님은 창세기 3 17–19절에서 아담에게 그의 타락으로 인해 노동에 수고와 고통이 따르게 되었음을 말씀하시며17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19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노동 자체가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이 저주를 받았으며, 그 결과 인간의 노동에수고이 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다룬 창세기 2 15절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타락 이전에도 아담은 땅을 경작했지만, 타락 이후에는 동일한 노동이 가시덤불과 엉겅퀴, 수고와 땀을 동반하게 되었다.

노동은 하나님의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더글러스 믹스(M. Douglas Meeks)는 노동에 대하여 서로 대조되는 두 가지 견해, 곧 노동을 저주로 보는 견해와 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고 말한다.[3] 그렇다면 노동은 하나님의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인가? 창세기 3 17절에서수고로 번역된 히브리어 잇차본(עִצָּבוֹן, ʿiṣṣāḇôn)고통,” “수고,” 또는고통스러운 노동을 의미한다.[4] 이 단어는 또한슬픔이나고통을 뜻하며, 이 문맥에서는 먹고 살아가기 위하여 해야 하는 힘들고 지속적인 노동, 곧 고된 수고를 의미한다.

앞에서 살펴본 아바드(עָבַד, ʿābad)와 잇차본(עִצָּבוֹן, ʿiṣṣāḇôn)을 비교하면 노동의 두 가지 모습을 구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아바드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창조 세계를 관리하는 청지기로서 수행하는 노동을 나타내는 반면, 잇차본은 타락 이후 생존을 위하여 감당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수고를 나타낸다. 아바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축복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 두시고 땅과 나무와 식물을 경작하고 돌보게 하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이러한 노동은 인간의 타락 이전부터 주어진 것이므로 노동 자체는 저주의 결과가 아니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 이후 땅이 저주를 받으면서 노동에는 고통스러운 수고가 따르게 되었다. 아담은 이제평생에 수고하여야땅의 소산을 먹을 수 있었고, “얼굴에 땀을 흘려야먹을 것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3:17–19). 따라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노동 자체가 저주로 바뀐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님의 축복으로 주어진 노동에 타락으로 인해 노동에 고통스러운 수고가 더해졌다고 할 것이다.

노동에 관한 하나님의 가르침

하나님은 출애굽기 20 9–11절에서 노동과 안식의 원리를 말씀하시며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은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쉬어야 한다. 심지어 인간의 노동을 돕는 가축에게도 안식이 주어져야 한다. 이러한 엿새 동안의 노동과 일곱째 날의 안식이라는 원리는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를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신 창조의 질서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에서힘써또는일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바드(עָבַד, ʿābad)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아바드는일하다,” “노동하다,” “경작하다,” 또는섬기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 아바드는 타락 이후의 고통스러운 수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정상적이고 적극적인 의미의 노동을 나타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히브리어 아바드(עָבַד)의 개념은 헬라어 오이코노메오(οκονομέω, oikonomeō)의 개념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다. 오이코노메오는 오이코노미아(οκονομία, oikonomia)와 같은 어근을 가진 동사로서 가계를 관리하거나 청지기로서 일을 수행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두 단어가 어원적으로 같은 말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가계라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 청지기 또는 종으로서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가계 안에서 하나님의 청지기이자 종으로서 일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전도서 5 18–19절은 노동의 수고를 통해 얻은 것을 누리고 즐거워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임을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에서 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보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그것이 그의 몫이로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수고와 노동은 때로 힘들고 고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재물과 부요를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누릴 수 있는 능력도 주신다. 더 나아가 자신이 하는 노동과 그 노동의 열매에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하신다.

따라서 사람이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재물과 부요를 얻고, 자신이 하는 일과 그 결과를 기쁨으로 누릴 수 있다면, 그 노동 역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물은 단순히 노동의 결과로 얻는 재물과 부요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일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 자신의 수고에서 만족과 즐거움을 얻는 것, 그리고 그 수고를 통하여 얻은 것을 누릴 수 있는 능력까지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다.

안식일에 행하신 예수님의 노동

그렇다면 유대인들에게 노동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안식일에 어떤 행위가 노동에 해당하는가를 판단하는 문제는 오랫동안 유대교에서 중요한 문제였다. 유대교 전통에서는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정하였으며, 정통파 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이러한 안식일 규정을 엄격하게 지키려고 한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의 일부 호텔이나 건물에서는 금요일 저녁부터 토요일 저녁까지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을 위하여 엘리베이터가 각 층에 자동으로 서고 문이 열리고 닫히도록 운행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흔히안식일 엘리베이터”(Sabbath elevator)라고 부른다. 정통파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는 행위도 피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자동으로 운행되는 엘리베이터가 아닌 경우에는 자신이 직접 버튼을 누르는 대신 비유대인에게 필요한 층의 버튼을 눌러 달라고 부탁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관행의 배경에는 안식일에 노동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구체적인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지킬 것인가에 관한 오랜 유대교의 전통과 해석이 있다. 유대인들은 여러 세대에 걸쳐 안식일에 허용되는 행위와 금지되는 행위를 세부적으로 규정해 왔으며, 오늘날에도 일부 정통파 유대인들은 이러한 전통적인 안식일 규정을 엄격하게 지키고 있다.

그렇다면 안식일에는 선한 일을 위해서라도 전혀 일해서는 안 되는가? 안식일에 행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 이 문제는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당시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사이에 중요한 논쟁을 일으켰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등의 일을 행하셨으며, 이를 통하여 안식일의 참된 의미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는 사실을 가르치셨다.  

마태복음 12 1–8( 2:23–28; 6:1–5)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고 있었다. 제자들은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기 시작하였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라고 비난하였다( 12:2).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를 안식일에 금지된 일, 곧 노동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이 엿새 동안의 노동을 멈추고 쉬면서 그 날을 거룩하게 지키며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과 율법 교사들은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에 관하여 여러 가지 세부적인 규정과 전통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세부 규정 가운데 많은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율법에서 직접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안식일 계명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기 위하여 후대의 유대교 전통에서 만들어지고 발전된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과 바리새인들 사이의 논쟁은 단순히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가의 문제가 아니었다. 예수님도 안식일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중요한 문제는 안식일에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는가, 그리고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본래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안식일에 어떤 종류의 일이 금지되는지를 구체적으로 규정하였다. 그들의 규정과 전통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작은 일이라도 금지된 노동에 해당할 수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이삭을 잘라 먹은 행위도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노동으로 보았다. 바리새인들의 율법 해석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노동을 중단하고 쉬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석은 달랐다. 예수님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하여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먹은 작은 행위를 안식일 계명을 범하는 노동으로 보지 않으셨다. 안식일의 목적은 인간에게 무거운 짐을 더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쉼을 주고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예수님은 안식일 계명을 단순히 모든 활동을 금지하는 규정으로 이해하지 않으셨다. 인간의 필요를 채우고 생명을 돌보는 행위는 안식일의 본래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러한 원리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 2:27). 이 말씀은 안식일이 인간을 억압하기 위한 제도가 아니라 인간에게 쉼과 유익을 주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예수님은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고 선언하셨다( 12:8).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안식일을 주신 것은 그들이 노동에서 벗어나 쉬며 하나님을 기억하고 예배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아니었다( 2:27).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인 의식에 참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의 예배에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절박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일도 포함된다. 따라서 안식일에 굶주린 사람이 먹을 것을 얻도록 하거나, 병든 사람을 고치거나,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 것은 안식일의 본래 목적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을 실천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율법의 문자적인 규정을 지키는 것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을 강조하셨다. 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는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하시면서( 12:7; 6:6), 제자들을 정죄한 바리새인들에게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무엇인지를 가르치셨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한 종교적인 규정과 의식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주신 본래의 목적을 놓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안식일이 인간을 억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쉼을 주고, 생명을 보호하며, 자비를 베풀고,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주어진 것임을 보여 주셨다.

마태복음 12 9–14( 3:1–6; 6:6–11)에서 예수님은 한쪽 손 마른 사람을 만나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기 위하여 마태복음 12 10절에서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 11–12절에서 안식일에도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강조하시며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후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고, 그가 손을 내밀자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온전하게 되었다( 12:13).

예수님은 안식일이라는 이유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병든 사람들을 고치셨으며, 때로는 이러한 치유를 통하여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보여 주셨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어떤 일을 해서는 안 되는가에 관심을 두었다면,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어떤 선한 일을 해야 하는가에 관심을 두셨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님의 관점에서 안식일에 모든 종류의 일을 무조건 금지하는 것이 안식일 계명의 목적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병든 사람을 고치며, 도움이 절실한 사람을 돕는 선한 일은 안식일에도 행할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단순히 일을 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데에도 있다( 12:12).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에게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자신의 백성에게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셨다( 20:8; 5:12).

안식일의 정신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은 안식일에 노동에서 벗어나 쉬면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예배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보호하시며 구원하신 것을 기억하면서 감사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주일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창조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린다.

그러나 안식일에 쉰다는 것이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을 외면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돕기 위하여 필요한 일을 할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에 병든 사람들을 고치시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도우심으로써 이러한 원리를 보여 주셨다. 예수님은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셨다( 2:27).

따라서 안식일의 정신은 단순히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안에서 노동을 멈추고 쉬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의 창조와 보호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데 있다. 동시에 도움이 필요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고 선을 행하는 것도 안식일의 정신에 부합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예배일로 지키는 주일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의 창조와 구원을 기억하며 영광을 돌리는 한편,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선을 행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지켰지만, 예수님 당시의 일부 종교 지도자들이 강조했던 지나치게 엄격한 안식일 규정은 사람들에게 기쁨과 평안, 위로와 영혼의 회복을 주기보다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될 수 있었다. 본래 하나님께서 주신 안식일은 인간에게 쉼과 회복을 주기 위한 것이었지만, 지나치게 세분화된 규정에 얽매이게 되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예수님은 자신이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언하시고( 12:8),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셨다( 12:12).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단순히 안식일의 규정을 지키는 방법이 아니라 안식일의 참된 의미와 정신을 가르치고자 하셨다. 안식일은 사람을 속박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쉼과 회복을 주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도록 주어진 날이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여러 가지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셨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자유는 단순히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의미의 무제한적인 자유가 아니다. 우리는 주일에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과 윤리의 범위 안에서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우리의 선택과 행동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하나님의 뜻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회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며 선을 행하는 데 사용해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안식일의 정신이며,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주일을 살아가는 데에도 적용할 수 있는 중요한 원리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 13절에서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고 권면한다. 모든 사람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그 자유를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데 사용할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으로서의 노동

하나님께서 타락한 여자와 남자에게 심판을 선언하셨지만( 3:16–19), 노동 자체가 하나님께서 내리신 저주는 아니다. 인간은 타락하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어 하나님께서 맡기신 창조 세계를 경작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가계를 위하여 행하는 모든 선한 노동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복이라고 할 수 있다.

타락 이후 노동에는 수고와 고통이 따르게 되었지만, 노동 자체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가치와 의미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인간은 여전히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하며,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다.

특히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마음과 뜻을 다하여 기쁨으로 행하고 그 노동에서 보람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다. 노동의 결과로 얻는 재물과 소유만이 하나님의 복이 아니라, 일할 수 있는 능력과 기회,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고 그 수고의 열매를 누릴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귀한 선물이다( 5:18–19).  

바울은 저명한 유대 율법 교사 가말리엘에게서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서( 22:3; 참조 행 5:34–39), 상당한 수준의 교육을 받은 학자였다. 그는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5]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동안 천막을 만드는 일을 자신의 생업으로 삼았다.

바울은 소아시아와 마게도냐를 비롯한 여러 지역의 도시들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고, 필요한 경우 자신의 손으로 일하여 생활비를 마련하였다. 고린도에서는 자신과 같은 생업에 종사하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 함께 지내며 일하였다. 사도행전 18 3절은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고 기록한다. 바울과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천막을 만드는 노동과 복음을 전하는 일은 서로 분리된 두 개의 삶이 아니었다. 그들은 함께 일하면서 생활에 필요한 것을 얻었으며, 동시에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가계를 확장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그들에게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복음 전파의 사명을 수행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는 중요한 경제 활동이었다.

바울은 자신의 손으로 일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필요를 스스로 감당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않고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기꺼이 노동하였다. 이러한 바울의 모습은 직업을 통한 노동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서도 하나님의 가계를 섬기고 복음 전파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바울은 골로새서 3 23절에서 일에 임하는 그리스도인의 자세에 대하여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바울이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비록 이 세상의 주인이나 고용주를 위하여 일한다고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주 하나님을 위하여 일한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이 세상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허락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노동은 단순히 고용주를 위하여 일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는 경제 활동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을 수행하는 청지기의 활동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람의 눈만 의식하여 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다는 마음으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일터도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자신의 능력과 시간을 바르게 사용하고, 그 노동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준다면 우리의 일상적인 노동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될 수 있다. 이것이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일하라는 바울의 노동에 관한 가르침이다.

바울은 데살로니가후서 3 10절에서 노동의 책임을 강조하며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라고 권면한다. 바울은 일할 능력이 있으면서도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노동의 책임을 강조하였다. 사람은 자신의 생활을 위하여 성실하게 일해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불필요한 경제적 부담을 주면서 살아가려고 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노동 자체를 선하거나 악한 것으로 단순하게 평가하기보다,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어떤 자세로 일하는가를 중요하게 가르친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주님께 하듯 일하고( 3:23),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한다면, 세상의 고용주를 위하여 하는 일상적인 노동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될 수 있다. 하물며 하나님과 그의 가계를 위하여 직접 수행하는 노동은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고 임금을 얻기 위한 경제 활동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기회를 사용하여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때 그 노동은 거룩한 의미를 가지며 하나님의 복을 받는 일이 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노동의 종류만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어떤 마음과 목적으로 일하는가이다

이상에서 논의한 노동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서로 다른 직업에 종사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중요한 메시지를 준다. 노동은 단순히 생계를 유지하거나 소득을 얻기 위한 경제활동만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신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노동은 인간의 타락 이전부터 주어진 삶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타락 이후 노동에는 수고와 어려움이 따르게 되었지만, 노동 자체가 저주가 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재능과 자원을 사용하고, 자신과 가족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다른 사람과 사회에 필요한 것을 공급한다.

따라서 직업의 종류나 사회적 지위만으로 노동의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기업가, 전문직 종사자, 교사, 공무원, 회사원, 자영업자, 농부, 노동자 등 각기 다른 직종에 종사하더라도 자신의 일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에게 직업은 단순히 사람을 위하여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수행하는 책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더 많은 소득이나 높은 지위를 얻는 것만을 직업의 성공으로 생각하기보다 자신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과 사회에 유익을 주는가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또한 성경은 노동과 함께 안식의 중요성도 가르친다. 열심히 일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노동이 인간의 삶 전체를 지배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의 안식을 명하셨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노동과 안식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온전한 삶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결국 현대의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직업을 하나님의 맡기심으로 받아들이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며, 노동의 열매에 감사하고, 적절한 안식을 누리며, 자신의 노동을 통하여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1] Strong’s Hebrew Concordance, “4399. melakah,” BibleHub.

[2] 같은 자료, “5647. abad,” BibleHub.

[3] M. D. Meeks, God The Economist. Fortress Press, 1989, 128-130.

[4] Strong’s Hebrew Concordance, “6093. itstsabon,” BibleHub.

[5] 최건수, 『바울의 생애, 서신들과 신학』 (서울: 쿰란출판사, 2013), 21-23.

 

 

 6 십일조와 세금

십일조의 시작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십일조는 아브라함이 살렘 왕이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던 멜기세덱에게 드린 십일조이다. 아브라함은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물리치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을 만났다. 창세기 14 18–20절은 아브람이 멜기세덱의 축복을 받은 후 자신이 얻은 것의 십분의 일을 그에게 준 일을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고 기록한다. 히브리서도 이 사건을 언급하면서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전리품 가운데 십분의 일을 주었다고 설명한다( 7:2–10).

멜기세덱’(מַלְכִּי־צֶדֶק, Malkî-edeq)이라는 이름은 문자적으로의의 왕이라는 뜻이다. 그는 아론 계열의 제사장이 아니었다. 멜기세덱은 아브라함 시대의 인물로서 아론보다 훨씬 앞서 살았으며, 아브라함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어느 지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의 제사장직은 훗날 모세의 율법에 따라 세워진 레위 지파와 아론 계열의 제사장직과는 구별된다. 히브리서는 멜기세덱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직을 보여 주는 중요한 모형으로 이해한다( 5:6–11; 6:20–7:17). 멜기세덱은 그의 이름의 뜻에 따라의의 왕이며, 살렘 왕이라는 점에서평강의 왕으로 설명된다( 7:2). 또한 히브리서는 성경에 그의 족보나 제사장직의 시작과 끝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사용하여 그를 하나님의 아들과 닮은 인물로 묘사한다( 7:3). 그러므로 멜기세덱 자신이 문자적인 의미에서 영원한 대제사장이라기보다, 그는 아론의 계통에 속하지 않으면서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 주는 구약성경의 모형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레위 계통의 제사장이 아니라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5:6; 6:20; 7:17).

그 후 성경에서 십일조가 다시 언급되는 것은 야곱이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중 벧엘에서 하나님께 서원할 때이다. 야곱은 꿈에서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약속을 들은 후 창세기 28 20–22절에서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서원하였다.

야곱의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야곱 자신이 하나님께 서원한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함께하시고, 여행길에서 보호하시며,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공급하시고, 마침내 자신을 아버지의 집으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시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하였다. 따라서 야곱의 십일조 약속은 조건적인 형태의 서원이었다. 야곱은 먼저 하나님의 보호와 공급과 복을 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어 자신을 안전하게 돌아오게 하시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것 가운데 십분의 일을 다시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야곱은 자신이 앞으로 얻게 될 소유와 재물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임을 인정하고, 그 가운데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겠다고 서원한 것이다.

십일조의 목적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에게 십일조를 드리도록 명하신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깨닫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 십분의 일을 자신에게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여 드리게 하시고, 나머지 십분의 구를 자신의 백성이 생활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허락하셨다. 레위기 27 30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또한 가축의 십일조에 대해서도모든 소나 양의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성물이 되리라고 말씀한다( 27:32).

따라서 십일조의 근본적인 의미는 단순히 자신의 소득 가운데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치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먼저 자신이 소유하고 누리는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림으로써 이러한 사실을 고백하고, 나머지 십분의 구 역시 자신의 절대적인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활하고 관리하도록 맡겨 주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일조는 하나님의 소유권과 인간의 청지기직을 동시에 보여 준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궁극적인 소유자이시며,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과 자원을 맡아서 사용하고 관리하는 청지기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 그들이 정복한 땅은 야곱의 열두 지파에게 기업으로 분배되었다. 그러나 레위 지파는 다른 지파들처럼 일정한 지역을 토지 기업으로 분배받지 않았다. 반면 요셉의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이 각각 하나의 지파로 인정되어 토지를 분배받았기 때문에, 레위 지파를 제외하면서도 토지를 분배받은 지파의 수는 열둘이 되었다.

레위인들은 다른 지파들처럼 넓은 지역의 토지를 기업으로 받는 대신,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 가운데서 거주할 성읍과 그 주변의 목초지를 받았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에게 모두 마흔여덟 개의 성읍을 주도록 명령하셨으며, 그 가운데 여섯 개의 성읍은 도피성으로 지정되었다( 35:1–8; 21). 따라서 레위인들이 받은 성읍은 일반 성읍 마흔두 개와 별도로 도피성 여섯 개가 추가된 것이 아니라, 모두 마흔여덟 개의 성읍 가운데 여섯 개가 도피성으로 지정된 것이었다.

레위 지파가 다른 지파들처럼 토지를 기업으로 받지 않았다는 사실은 십일조 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레위인들은 성막과 후에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담당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른 이스라엘 지파들이 드리는 십일조를 그들의 생활을 위한 몫으로 주셨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십일조는 단순히 하나님께 드리는 종교적인 헌물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계 안에서 특별한 직무를 담당하는 레위인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경제적인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이 성막과 후에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념하도록 하셨다. 다른 지파들처럼 넓은 토지를 기업으로 받아 농사를 지으며 생활하는 대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들이 드리는 십일조를 통하여 레위인들의 생활이 유지되도록 제도를 마련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번제, 소제, 화목제, 속죄제, 속건제와 같은 여러 제사를 드렸다. 이러한 제물들은 각각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과 규례에 따라 드려졌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제사장들에게 몫으로 주어졌다. 이와 구별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십일조는 성막에서 봉사하는 레위인들의 생활을 지원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기업으로 주어졌다. 하나님은 민수기 18 21절에서 레위인들에게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십일조를 기업으로 주셨음을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레위인들에게 십일조는 다른 지파들이 받은 토지 기업을 대신하는 경제적 기업의 역할을 하였다. 레위인들은 회막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섬기는 일을 담당하였고, 다른 지파들은 자신들이 얻은 소득의 십일조를 드림으로써 그들의 생활을 지원하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가계 안에서 각 지파는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하면서 서로의 필요를 채워 주었다.

그러나 십일조를 받은 레위인들도 자신들이 받은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들 역시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 가운데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려야 했다. 하나님은 민수기 18 28절에서 레위인들에게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모든 것의 십일조 중에서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고 여호와께 드린 그 거제물은 제사장 아론에게로 돌리되라고 말씀하신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드리면, 레위인들도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 가운데 다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려 제사장 아론에게 돌렸다. 이는 레위인들 역시 자신들이 받은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고, 그 가운데 일부를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렸음을 보여 준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소득에서 십일조를 구별하여 레위인들에게 주었고, 레위인들은 자신들이 받은 십일조 가운데 다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제사장인 아론의 자손들에게 주었다. 이를 흔히십일조의 십일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민수기 18 26절에서 레위인들에게너희가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받는 십일조 중에서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그들이 구별하여 하나님께 드린 몫은 제사장 아론에게 돌리도록 하셨다( 18:28). 따라서 십일조의 분배 구조는 이스라엘 백성에서 레위인들에게, 그리고 레위인들이 받은 십일조의 십분의 일은 다시 아론 계열의 제사장들에게 전달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민수기 18장에는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레위인들에게서 받은 이 몫 가운데 다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드려야 한다는 별도의 규정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제사장들은 레위인들이 구별하여 드린십일조의 십일조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이스라엘의 십일조 제도에는 가난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기능도 있었다. 매 삼 년 끝에는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따로 저축하여 성읍 안에 두도록 하였다. 그러면 자기들과 같이 토지의 기업이나 분깃을 받지 못한 레위인뿐만 아니라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할 수 있었다( 14:28–29; 26:12).

십일조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표현인 동시에 하나님의 가계 안에서 경제적인 자원을 분배하는 역할도 하였다. 십일조를 통하여 성막과 성전에서 봉사하는 레위인과 제사장들의 생활을 지원하였으며, 동시에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와 같이 경제적으로 취약한 사람들의 필요도 채워 주었다. 이러한 점에서 십일조 제도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신앙적인 의미와 함께,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경제적·사회적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모세는 신명기 14 22–23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에 따르면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토지에서 얻은 소산의 십일조를 구별하여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가져가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 앞에 함께 모여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와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으며, 하나님께서 주신 소산을 함께 누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배웠다. 따라서 신명기 14장에 나타난 십일조는 단순히 자신의 소득 가운데 십분의 일을 포기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소산 가운데 십분의 일을 구별하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먹고 누리면서 자신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기억하였다.

이러한 십일조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이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배우도록 하는 것이었다( 14:23). 다시 말하면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모든 소유와 소득의 궁극적인 근원이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누리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게 하는 신앙적·경제적 훈련이었다.  

십일조의 목적과 연관하여 신명기 14 23절 말씀의 영어성경 번역들을 인용하자면, 

이는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경외하기를 배우게 하려 함이라.” (New International Version, NIV)

그렇게 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항상 공경하기를 배우도록 하라.” (The Good News Translation, GNT)

십일조의 목적은 여러분의 삶에서 언제나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다.” (The Living Bible, TLB)

TLB가 그 의미를 적절하게 번역한 것처럼, 십일조의 목적은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기억하게 하는 데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십분의 구를 우리의 필요를 위하여 사용하고 관리하도록 맡겨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한다. 십일조는 단순히 우리가 가진 것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행위가 아니라, 십분의 십 모두가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신앙의 표현이다.

모세는 신명기 14 28–29절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삼 년마다 그해 소산의 십일조를 성읍에 저축하여 레위인과 거류민, 고아와 과부를 돌보도록 명하며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고 말한다( 14:28–29; 또한 신 26:12–14 참조).

매 삼 년 끝에 구별한 이 십일조는 토지의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뿐만 아니라,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와 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들이 와서먹고 배부르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십일조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표현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돌보는 경제적 기능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따라서 십일조의 또 다른 목적은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을 기억하고 그들의 필요를 돌보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재물은 오직 우리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이웃과 나누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일조는 하나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기억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웃을 기억하고 돌보도록 가르치는 하나님의 경제적 제도이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에 왕정이 세워진 후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레위인들을 위하여 드리는 십일조와는 별도로 왕에게도 경제적인 부담을 지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나라들처럼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요구하자,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 왕이 그들에게 부과하게 될 경제적인 부담을 경고하셨다. 사무엘상 8 15–17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가 또 너희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너희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삼상 8:15–17).

여기에서 왕이 거두는십일조는 레위인들의 생활을 지원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는 성격이 달랐다. 그것은 왕과 그의 관리들과 왕정 체제를 유지하기 위하여 백성에게 부과되는 일종의 세금 또는 조세와 같은 것이었다. 따라서 왕정 아래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뿐만 아니라 왕정의 운영을 위하여 자신들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과 양 떼 가운데 일부를 왕에게 내야 하는 추가적인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무엘상 8 15–17절은 왕에게 십분의 일을 바치라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새로운 십일조의 규정이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인간 왕이 백성의 재산과 소득을 거두어 감으로써 그들에게 무거운 경제적 부담을 줄 수 있음을 경고하신 말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 본문에 나타난 왕의 십분의 일은 종교적인 십일조라기보다 왕정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조세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역대하 31 5–6절은 히스기야 왕의 명령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이 첫 열매와 십일조를 풍성하게 드린 일을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첫 열매들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유다 여러 성읍에 사는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왔고 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왔으며 그것을 쌓아 여러 더미를 이루었는데라고 기록한다(대하 31:5–6; 또한 대하 31:12 참조). 이 말씀은 히스기야 왕의 종교개혁 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밭의 소산뿐만 아니라 소와 양의 십일조도 풍성하게 가져왔음을 보여 준다. 이렇게 거두어진 십일조는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여호와의 율법에 전념할 수 있도록 그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대하 31:4).

앞에서 살펴본 십일조들을 각각 별도의 십일조로 이해하여 단순하게 계산한다면, 왕정 이전에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레위인들을 위한 십일조 10퍼센트를 드리고, 매 삼 년 끝에는 레위인과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를 위한 십일조 10퍼센트를 별도로 구별하였다고 볼 수 있다. 후자를 연평균으로 환산하면 약 3.3퍼센트가 되므로, 전체적인 부담은 연평균 약 13.3퍼센트에 해당한다.

왕정이 시작된 후에는 여기에 왕이 곡식과 포도원 소산 및 양 떼에서 거두어 가는 십분의 일이 추가될 수 있었다(삼상 8:15–17). 이것을 10퍼센트의 조세로 계산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적인 부담은 연평균 약 23.3퍼센트에 해당한다고 계산할 수 있다. 즉 레위인들을 위한 십일조 10퍼센트, 왕이 거두어 가는 약 10퍼센트, 그리고 매 삼 년 끝에 가난한 레위인과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구별한 십일조를 연평균으로 환산한 약 3.3퍼센트이다. 그러나 이러한 13.3퍼센트와 23.3퍼센트라는 수치는 성경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시적으로 제시한 연간 세율은 아니다. 이것은 각각의 십일조를 서로 별도의 의무로 이해하고, 매 삼 년의 십일조를 연평균으로 환산하며, 사무엘상 8장의 왕이 거두는 십분의 일을 매년 부과되는 조세로 이해할 경우에 얻어지는 계산이다.

십일조 제도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토지의 소산에서 십일조를 구별하여 레위인들에게 주었으며, 레위인들은 이를 통하여 성전에서 맡은 직무를 수행하며 생활에 필요한 것을 공급받았다. 느헤미야 10 37–38절은 이러한 제도가 다시 시행된 것을또 처음 익은 밀의 가루와 거제물과 각종 과목의 열매와 새 포도주와 기름을 제사장들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여러 방에 두고 또 우리 산물의 십일조를 레위 사람들에게 주리라 이 레위 사람들이 우리의 모든 성읍에서 산물의 십일조를 받는 자임이며 레위 사람들이 십일조를 받을 때에는 아론의 자손 제사장 한 사람이 함께 있을 것이요 레위 사람들은 그 십일조의 십분의 일을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의 전 곳간의 여러 방에 두되라고 기록한다( 10:37–38).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모세의 율법에서 규정된 십일조의 기본적인 분배 구조는 포로 이후에도 이어졌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소산에서 십일조를 레위인들에게 주었고, 레위인들은 받은 십일조 가운데 다시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하나님의 성전 곳간에 가져갔다. 이는 민수기 18 21절과 26–28절에서 규정된 십일조 제도가 포로 이후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도 계속 시행되었음을 보여 준다.

십일조는 이처럼 특정한 시대에만 일시적으로 시행된 제도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성막과 성전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의 생활을 지원하고 하나님의 가계를 유지하는 중요한 경제적 제도로 기능하였다.

온전한 십일조

말라기 3 8–10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십일조와 봉헌물을 제대로 드리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한 행위로 지적하며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고 말씀한다( 3:8–10).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십일조가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드리는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십일조는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앙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의 표현이다. 우리가 무엇을 어떠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가는 하나님을 우리 삶에서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며 우선에 두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따라서온전한 십일조는 단순히 정확한 액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믿음의 문제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것을 감사함으로 관리하고 그 가운데 일부를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 삶의 첫째 자리에 모시는 신앙의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일조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감사, 그리고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함께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신약성경의 십일조

예수님은 마태복음 23 23절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는 철저히 드리면서도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을 소홀히 한 것을 책망하시며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신다( 23:23; 또한 눅 11:42 참조).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호세아 6 6절에서 하나님께서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고 말씀하신 것과 그 기본적인 정신에서 서로 통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명령하신 제사와 번제를 더 이상 원하지 않으신다는 뜻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십일조 자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함께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실천해야 함을 강조하셨다. 결국 두 말씀에서 공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신앙의 우선순위이다. 외적인 종교 행위를 형식적으로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 믿음을 정의와 긍휼의 삶으로 나타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마태복음 23 23절에서 예수님은 십일조 자체를 부정하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시 율법 아래에 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함께 율법의 더 중요한 요구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그들이 박하와 회향과 근채와 같은 작은 농산물에 이르기까지 세밀하게 십일조를 계산하면서도 정작 율법의 더 중요한 정신을 소홀히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단순히 십일조의 액수나 형식만이 아니라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의 신앙과 그 십일조에 담긴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왜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소득 가운데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가? 그것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을 우리에게 맡겨 사용하며 살아가도록 허락하신 것에 감사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를 드리면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저버린다면 십일조가 나타내야 할 하나님 중심의 삶과 그 정신을 온전히 실천하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일부 성경학자들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하신 십일조, 특히 레위인들의 생활을 위하여 구별하도록 하신 십일조를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바치는 일종의 조세로 이해하기도 한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은 단순히 개인적인 신앙의 대상만이 아니라 자신의 백성을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셨으며, 십일조는 레위인들과 제사 제도를 유지하고 공동체 안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경제적 기능도 수행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십일조를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시행된 일종의 종교적·사회적 조세로 이해하기도 한다.

예수님과 세금

세금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 반 세겔에 해당하는 두 드라크마의 성전세를 거두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예수님도 성전세를 내시는지를 물었다( 17:24; 30:13–16 참조).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성전세를 낼 의무에서 자유로우심을 말씀하시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세금을 내도록 하셨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고 말씀하셨다( 17:27).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공동체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성전세를 납부하셨음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성전세를 낼 의무가 없음을 암시하셨다. 세상의 왕들이 자기 자녀들에게서 세금을 받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본래 아버지의 성전을 위하여 세금을 내야 할 의무가 없으셨다는 것이다( 17:25–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불필요한 오해나 걸림돌을 만들지 않기 위하여 성전세를 내셨으며, 베드로의 몫까지 함께 지불하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세금이나 당시의 제도를 단순히 거부하지 않으셨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마태복음 17장의 두 드라크마는 로마 정부에 내는 세속적인 세금이 아니라 성전의 운영과 관련된 종교적인 부담금이었다. 따라서 이 본문만으로 예수님의 세속 정부와 세금에 대한 전체적인 태도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세속 정부에 내는 세금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말씀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22:21; 12:17; 20:25). 예수님은 세속 정부의 정당한 요구를 무조건 거부하도록 가르치지 않으셨다. 동시에 인간 정부에 대한 의무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께 대한 의무가 궁극적으로 우선한다는 사실도 분명히 하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당시의 세금과 사회적 의무를 무조건 거부하지 않으셨지만, 그것들을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서 이해하셨다고 할 수 있다.

세금에 관한 또 다른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하려고 하였다( 22:15–22; 12:13–17; 20:20–26). 그들은 마태복음 22 17절에서 예수님에게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라고 물었다.

이 질문은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예수님께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 한다고 대답하시면 로마의 지배와 세금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의 반발을 살 수 있었고, 반대로 세금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대답하시면 로마의 통치에 저항하도록 선동한다는 정치적인 고발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악한 의도를 아시고 지혜롭게 대답하셨다. 예수님은 세금으로 내는 돈을 자신에게 보여 달라고 하신 후, 그 동전에 새겨진 형상과 글이 누구의 것인지를 물으셨다. 그들이가이사의 것이니이다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다( 22:21).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도 세속 정부에 대하여 마땅히 이행해야 할 경제적·사회적 의무가 있음을 인정하셨다. 따라서 세금을 납부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바치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인간 정부의 권위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있음을 분명히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세속 정부에 속한 정당한 의무를 이행해야 하지만, 궁극적인 충성과 순종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세금

바울은 로마서 13 6–7절에서 세금 납부를 세상의 통치 권세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과 연결하여너희가 조세를 바치는 것도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들이 하나님의 일꾼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고 말한다( 13:6–7).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Nero)였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의 통치 권세를 인정하고 그들에게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라고 가르친다. 특히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라고 권면함으로써 세금 납부가 그리스도인이 사회 안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 가운데 하나임을 분명히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법적으로 부과된 세금을 정직하게 납부해야 하며, 탈세나 부정한 방법으로 세금 납부의 의무를 피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합법적인 절세(tax avoidance)와 불법적인 탈세(tax evasion)는 구별되어야 한다. 납세자가 세법이 허용하는 각종 공제, 면제, 세액공제 및 감면 규정을 검토하여 자신의 세금 부담을 합법적으로 줄이는 것은 정당한 경제적 의사결정이다. 법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세금을 절약하는 것 자체는 납세의 의무를 회피하는 행위라고 할 수 없다. 반면 탈세는 소득을 숨기거나 허위로 신고하는 등의 방법으로 법에 따라 납부해야 할 세금을 불법적으로 회피하는 행위이다. 이는 법을 위반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라는 바울의 가르침에도 어긋난다( 13:7).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합법적인 방법으로 세금 부담을 줄일 수는 있지만, 불법적인 방법으로 납부해야 할 세금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십일조와 세금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에게서 받은 십일조를 사용하여 레위인들의 생활을 지원하셨다. 레위인들은 다른 지파들처럼 토지의 기업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성막과 후에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시간과 노력을 온전히 바칠 수 있도록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십일조를 그들의 생활을 위하여 사용하게 하셨다. 이러한 점에서 구약의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종교적인 헌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서 레위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일종의 조세와 같은 경제적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구약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소산 가운데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렸으며, 이것은 정기적으로 레위인들의 생활을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18:21). 또한 매 삼 년 끝에는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성읍에 저축하여 토지의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가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도록 하였다( 14:28–29; 26:12). 이 십일조를 정기적으로 드리는 레위인들의 십일조와 구별되는 별도의 십일조로 이해한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소득 가운데 추가적인 몫을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위하여 사용한 셈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나라들과 같이 자신들을 다스릴 왕을 요구하여 왕정이 세워진 후에는 왕에게도 추가적인 경제적 부담을 지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미 사무엘을 통하여 왕이 그들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과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갈 것이라고 경고하셨다(삼상 8:15–17). 이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십일조와는 달리 왕과 그의 관리들을 비롯한 왕정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조세였다.

따라서 구약의 십일조와 왕에게 내는 조세는 하나님의 백성이 얻은 경제적 자원이 개인만을 위하여 사용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그 자원은 하나님을 섬기는 레위인들을 지원하고,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와 같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며, 왕정이 세워진 후에는 국가의 통치 체제를 유지하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그러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소득 가운데 십분의 일을 구별하여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께 드린다. 교회는 이러한 십일조와 헌금을 목회자의 생활을 지원하는 데 사용할 뿐만 아니라, 교회의 여러 사역과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구제 활동, 지역사회 지원, 선교사 후원 등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사용한다.

교회가 목회자의 생활을 충분히 지원할 수 있다면, 목회자는 생계를 위하여 별도의 직업을 갖기보다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며 교회를 섬기는 사역에 전념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오늘날 교회의 목회자는 구약시대의 레위인들과 경제적 기능 면에서 어느 정도 유사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구약시대에 레위인들이 토지의 기업을 받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이 드리는 십일조를 통하여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성막과 성전에서 섬기는 일에 전념했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교회는 성도들이 드리는 헌금을 통하여 목회자의 생활을 지원함으로써 그들이 교회의 사역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한다.

신약성경에서도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섬기는 사람들이 그 사역을 통하여 생활에 필요한 지원을 받는 원리를 찾아볼 수 있다. 바울은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고 말한다(고전 9:14). 또한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권면한다( 6:6). 따라서 교회가 목회자의 생활을 지원하여 그가 말씀과 목회 사역에 전념하도록 하는 것은 구약의 레위인 제도와 일정한 연속성을 보여 주면서도 신약성경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는 원리이다.

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소득이 있을 때 미국의 경우, 연방정부, 주정부 및 지방정부에 소득과 관련된 세금을 납부하며,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할 때에도 판매세를 비롯한 여러 세금을 부담한다. 이처럼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형태의 세금을 정부에 납부하고, 정부는 이렇게 거두어들인 조세를 정부의 운영과 다양한 공공서비스를 위하여 사용한다.

반면 소득이 없거나 매우 적은 사람들은 정부로부터 경제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지원에는 음(-)의 소득세(negative income tax)와 같은 제도, 현금이전(cash transfers), 그리고 현물급여(in-kind transfers)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정부의 이전지출은 저소득층과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의 기본적인 생활을 지원하고 소득을 재분배하는 기능을 한다.

이러한 현대의 소득재분배 제도는 제도의 형태와 역사적 배경은 다르지만, 경제적 기능이라는 측면에서는 구약시대에 매 삼 년 끝에 시행된 십일조와 어느 정도 유사한 점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 삼 년 끝에 그 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성읍에 저축하여 토지의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가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고 명령하셨다( 14:28–29; 26:12).

따라서 구약의 삼 년째 십일조와 현대 정부의 이전지출은 동일한 제도는 아니지만,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원의 일부를 거두어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는 소득재분배의 기능을 한다는 점에서는 서로 비교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구약의 십일조 제도에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지원하는 기능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사회적으로 취약한 이웃을 돌보는 사회적 안전망(social safety net)의 기능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소득이 있으면 자신의 소득 수준과 적용되는 세율에 따라 연방소득세(federal income tax), 주에 따라서는 주소득세(state income tax)를 납부한다. 미국의 소득세는 기본적으로 누진세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득 수준에 따라 적용되는 세율이 달라진다. 또한 사람들은 소득세뿐만 아니라 사회보장세와 메디케어세와 같은 급여세(payroll taxes)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세금을 부담한다. 따라서 개인이 실제로 부담하는 전체 조세의 규모는 소득 수준, 거주하는 주, 각종 공제와 세액공제 및 개인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조세는 미국 연방정부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다. 연방정부가 거두어들이는 개인소득세, 급여세, 법인소득세 및 기타 조세 수입은 정부의 다양한 활동을 위한 재원으로 사용된다. 여기에는 사회보장(Social Security), 국방, 메디케어(Medicare)와 메디케이드(Medicaid)를 비롯한 주요 보건의료 프로그램, 실업급여와 저소득층에 대한 식품 및 주거 지원과 같은 사회안전망 프로그램, 국가채무에 대한 이자 지급,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정부 프로그램이 포함된다. 따라서 현대 정부가 거두는 조세는 정부 자체의 운영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방과 공공서비스를 제공하고, 노인과 저소득층 및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지원하며, 사회 전체의 다양한 필요를 충족시키는 데 사용된다.

오늘날의 조세는 과거보다 훨씬 다양한 목적과 정부 활동을 위하여 사용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여러 종류의 세금을 부담한다. 미국의 납세자들은 연방소득세, 주에 따라 부과되는 주소득세, 사회보장세(Social Security tax), 메디케어세(Medicare tax), 그리고 상품과 서비스를 구입할 때 부과되는 판매세(sales tax) 등을 부담한다. 이러한 여러 세금을 모두 합하면 많은 사람들의 전체적인 조세부담은 소득의 10퍼센트를 넘을 수 있으며, 소득 수준과 거주 지역 및 소비 형태 등에 따라서는 전체 조세부담이 소득의 30–40퍼센트에 이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하신 십일조는 기본적으로 일정한 비율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비례세(proportional tax)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소산의 십분의 일을 레위인들을 위하여 구별하였으며( 18:21), 왕정 아래에서는 왕도 곡식과 포도원 소산 및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갈 수 있었다(삼상 8:15–17). 이러한 십분의 일이라는 일정한 비율만을 놓고 본다면, 현대 경제학의 개념으로 비례적인 부담과 비교할 수 있다.

반면 오늘날 미국의 연방 개인소득세(federal individual income tax)는 누진세(progressive tax) 구조를 가지고 있다. 소득이 증가함에 따라 납세자는 더 높은 한계세율 구간(marginal income tax bracket)에 들어가며, 높은 세율은 전체 소득이 아니라 해당 세율 구간에 속하는 추가적인 과세소득에 적용된다. 따라서 일반적으로 소득이 높은 사람일수록 연방 개인소득세에서 더 높은 한계세율을 적용받는다. 그러나 미국의 모든 세금이 누진적인 것은 아니다. 사회보장세와 메디케어세 같은 급여세와 주 및 지방정부의 판매세 등은 연방 개인소득세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부과된다. 따라서 구약의 십일조 제도와 오늘날의 미국 조세제도를 비교할 때에는, 구약의 십일조는 일정한 비율을 적용한다는 점에서 비례세와 유사한 반면, 현대 미국의 연방 개인소득세는 대표적인 누진세 제도라고 할 것이다.

이상에서 논의한 십일조와 세금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과 사회에 대한 경제적 책임을 함께 생각하게 한다. 먼저 십일조는 구원을 받기 위한 조건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구원은 십일조나 다른 행위의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따라서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 자체가 구원을 보장하거나,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이 곧 구원을 잃는다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십일조의 더 중요한 의미는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왔으며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는 데 있다.

구약에서 십일조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면서 동시에 레위인과 제사장을 지원하고, 거류민과 고아와 과부와 같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데 사용되었다. 예수님도 십일조 자체를 부정하지 않으셨지만,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라는 더 중요한 가치를 소홀히 하면서 형식적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태도를 책망하셨다( 23:23).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것은 단순히 소득의 십분의 일을 정확하게 계산하여 드렸는가 하는 문제를 넘어, 하나님께 받은 것을 감사하며 교회와 복음 사역을 지원하고 어려운 이웃과 나누는 청지기적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세금은 십일조와 성격과 목적이 다르지만, 그리스도인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감당해야 할 경제적 책임이다. 예수님은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고( 22:21), 바울도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라고 권면하였다( 13:7).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법적으로 부과된 세금을 정직하게 납부해야 한다. 동시에 정부도 국민이 납부한 세금을 맡겨진 공공의 자원으로 인식하고 공정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하여 공동체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국민의 삶을 보호할 책임이 있다.

결국 십일조와 세금은 모두 우리가 재물을 어떻게 바라보고 사용하는가에 관한 중요한 경제윤리적 문제이다. 십일조는 구원을 얻기 위한 대가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감사의 표현이며, 세금은 우리가 속한 사회에 대한 책임의 표현이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모든 소유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인정하면서 하나님께 드릴 것을 감사함으로 드리고, 국가와 사회에 대한 경제적 의무도 정직하게 감당해야 한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우리의 경제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청지기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